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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25
한자 尹顯振
영어음역 Yun Hyeonjin
이칭/별칭 의백(義伯),우산(右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백양대로1124번길 20[구포2동 725]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정치인|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 차장
출생 시기/일시 1892년 9월 1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9년 - 만성재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7년 - 구명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8년 9월 13일 - 구명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메이지대학 법학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6년 - 메이지대학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구포저축주식회사에 주주로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5년 10월 - 유학생학우회 총무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비밀 결사 신아동맹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대동청년단의 비밀 결사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양산 의춘학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1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 차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9월 15일 - 대표자 연석회의에 여운형·김규식과 상해기성회 대표로 참석
몰년 시기/일시 1921년 9월 16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 3월 1일연표보기 - 건국 공로 훈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59년 4월 15일 - 대한국사 윤현진 선생 기념비 건립
출생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 725
학교|수학지 구명학교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메이지대학 법학과 - 일본 도쿄
활동지 의춘학원 - 경상남도 양산시
활동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 중국 상하이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기념비 대한국사 윤현진 선생 기념비 -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춘추 공원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수학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파평. 자는 의백(義伯), 호는 우산(右山). 할아버지는 동래 출신의 만석꾼으로 동래 부사와 사천 군수를 지낸 윤홍석(尹洪錫)[1843~1902]이고, 아버지는 동래 부사 겸 동래 감리·경상 우도 관찰사를 역임한 윤필은(尹弼殷)[1861~1903]이다. 작은아버지는 고성 군수와 울산 군수 등을 역임한 윤명은(尹命殷), 구포은행과 구명학교를 설립한 윤상은(尹相殷), 구포은행 주주와 구명학교 교장과 구포공립보통학교 학무 위원을 지낸 윤영은(尹永殷)이다.

아버지 윤필은은 25세 때인 1886년 12월 3일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자마자 생활 터전을 동래에서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로 옮겼다. 이유는 당시 갯가 사람들은 벼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과거를 칠 때 불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활동 사항]

윤현진(尹顯振)[1892~1921]은 1892년 9월 16일에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인 1899년 고향의 서숙(書塾) 만성재(晩惺齋)에 입학하여 한학을 배웠다. 15세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6세인 1908년 한 살 위인 엄정자(嚴貞子)[1891~1959]와 결혼하여 외아들 윤동건(尹東健)[1908~1964]을 낳았다.

1908년 9월 13일 구명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뒤 숙부 윤상은을 비롯해 구포 일대 객주들과 동래·양산 지역 부호들이 중심이 되어 세웠던 구포저축주식회사에 주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7세 때인 1909년 중국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흐름을 접하고 외국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교유하며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났다. 중국을 다녀 온 윤현진은 22세 되던 1914년 봄 일본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한말부터 일본 유학을 가기 시작한 많은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에서 여러 단체들을 결성하였다. 이들 단체들의 연합체 성격의 유학생학우회가 1913년 결성되었다. 유학생학우회는 1917년 중앙 통일 지도적 조직으로 발전하였으며 윤현진은 유학생학우회에서 1915년 10월에서 1916년 2월까지 회장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총무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윤현진김철수(金綴洙)·장덕수(張德秀) 등 8명의 조선인 유학생과 중국인 황각(黃覺) 등을 비롯한 유학생 40여 명과 함께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세울 목적으로 비밀 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였다. 신아동맹당원의 한국인 핵심 멤버들은 유학생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을 주도하였다.

윤현진은 24세 때인 1916년 일본 유학 2년 만에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19년 상하이로 건너가기까지 만 3년 동안 국내에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비밀 결사 운동, 양산 의춘학원(宜春學院)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 상업 활동 등을 통해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던 윤현진은 1919년 3월 21일 동지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 윤현진은 상하이에 도착하여 1919년 4월 13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7개 위원회 중 신익희와 함께 내무 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 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재무 총장은 이시영(李時榮)이 맡았다. 윤현진은 1921년 2월 22일까지 재무 차장을 지내면서 큰형 윤현태와 안희제(安熙濟)를 통해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많은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자금으로 충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설립 당초부터 내부 분열을 거듭하였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1년 2월 개혁을 위한 국민 대표 회의의 소집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21년 9월 15일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 주최로 상하이와 베이징의 대표자 연석회의가 개최될 때, 윤현진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상해기성회 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개조에 앞장섰다. 그러나 재무 차장 업무로 인한 과로 탓에 1921년 9월 16일 오후 2시 상하이 바오창루[寶昌路] 바오캉리[寶康里] 54번지에서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 16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수많은 만장과 수레 3대가 동원될 정도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모든 이들이 애석해 하였다. 시신은 상하이 외국인 묘지 정안사(靜安寺)에 안장되었는데 동생의 죽음에 비통해 하였던 윤현태는 뒤늦게 상하이에 도착하여 순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워 슬픔을 달랬다.

[저술 및 작품]

「학지광 제5호에 기함」(『학지광』 5, 1915)이 있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애국 지사 제1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3월 1일에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1959년 4월 15일 양산군민 일동 명의로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춘추 공원 내 윤현진의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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