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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277
한자 德川洞遺蹟
영어의미역 Remains of Deokcheon-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고분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산107-11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홍보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덤
양식 덧널무덤|널무덤|회곽묘|독무덤
소유자 북구청
관리자 부산광역시 북구청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함
소재지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산107-11
출토 유물 소장처 동아대학교 박물관 -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 있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무덤 유적.

[위치]

동서로 관통하는 남해안 고속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구포 왜성(龜浦倭城)의 본성(本城)이 있고, 남쪽에는 지성(枝城)이 분포하는데, 덕천동 유적은 지성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북구 실내 빙상 경기장 건립에 앞서 200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이곳에서 삼국·고려·조선 시대의 분묘와 임진왜란 때 축조된 왜성의 지성 일부가 확인되었다.

[형태]

삼국 시대의 분묘는 덧널무덤 2기로, 해발 28~29m 높이의 구릉 정상부 남동쪽 사면의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장축을 등고선과 나란하게 배치하였다. 덧널무덤의 규모는 길이 250~400㎝, 너비 90~150㎝이고, 원래 지형이 많이 깎여 깊이는 매우 얕다. 무덤의 규모는 소형에 해당한다. 묘광을 파고, 목곽을 설치한 뒤 충전토를 채운 일반적인 덧널무덤의 구조이다.

고려 시대의 널무덤은 모두 18기가 확인되었고, 구릉 정상부 일대에 분포하며, 장축이 등고선 방향과 직교한다. 무덤의 크기는 길이가 200㎝ 내외이고, 너비는 40~60㎝, 깊이는 20~60㎝ 내외이다. 대부분의 무덤에서 쇠못이 나왔고, 쇠못 끝에 나뭇결이 붙어 있어 목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8·9호 널무덤은 매장자의 허리 아래 부위에 부정형의 구덩이를 판 요갱(腰坑)이 설치되었고, 5호 묘에는 묘광 벽면 상단에 감실이 마련되었다.

조선 시대 분묘는 31기이며, 널무덤·회곽묘(灰槨墓)·독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회곽묘는 석회에 재첩 껍데기와 진흙을 섞어 만들었으며, 유물은 대부분 출토되지 않았다. 22호 널무덤은 묘광을 2단으로 파고, 2단의 묘광 위에 큰 암키와 5매를 뚜껑으로 덮은 특이한 구조이다. 24호 묘에는 묘광 벽면 상단에 감실(龕室)이 마련되었다. 관 못이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볼 때, 목관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무덤은 손잡이가 대칭되게 부착된 2개의 옹 아가리를 맞댄 합구식(合口式)이다.

왜성과 관련된 시설로는 굴립주 건물지 24동과 이중의 구상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18동은 성곽 내부에 위치하고, 6동은 외곡에 위치한다. 건물지는 정면 1칸·2칸·3칸·4칸·6칸 등 다양하고, 측면은 1칸이다. 구상 유구는 구릉의 정상부 가장자리를 따라 평면 형태가 ㄷ자 형으로 이중으로 돌려져 있다. 구상 유구의 단면 형태는 V자 형이고, 내부에 분청사기·옹기와 함께 16세기 일본 전국 시대의 스리바치[뇌발(擂鉢)]라 불리는 조리용 옹기 등이 판축 기법[건물을 올리기 전에 땅을 돌과 흙을 번갈아 섞어 가며 다지는 것]과 같이 인위적으로 흙을 채웠다. 이 구상 유구는 성의 석축을 쌓기 위해 판 시설이다. 이곳의 왜성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旱川隆景]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축조하여 1597년까지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출토 유물]

덧널무덤 내부에서 굽다리 곧은 목 항아리[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사발[완(碗)]·격자 또는 평행 타날(打捺)된 둥근 밑 항아리[원저 단경호(圓底短頸壺)]·파수부 노형 토기(把手附爐形土器)·굽다리 접시[고배(高杯)]·연질 옹(軟質甕)·노형 토기 등의 토기류와 쇠낫[철겸(鐵劍)]·쇠도끼[철부(鐵斧)]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부장된 유물의 수는 10여 점 내외로 소량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4세기 후반의 금관가야 양식 토기로서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4세기 후반의 유물과 양상이 같다.

고려 시대의 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목관과 묘광 사이의 공간에서 출토되었는데, 동이·병 등의 도기와 접시·대접·뚜껑 갖춤 그릇[유개합(有蓋盒)]·소병·마상배(馬上杯)[말 위에서 사용하는 술잔] 등의 청자, 숟가락과 젓가락, 청동 거울, 중국 송나라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청자는 무문도 있지만, 대부분 상감청자로서 백상감과 흑상감 등이다. 청자는 내면과 외면에 연화문(蓮花紋)·모란문(牡丹文)·당초문(唐草文)·국화문(菊花文)·초화문(草花文)·중권문(重圈文)·화문(花文) 등 다양한 문양을 새겼다. 1호 널무덤에서는 여러 점의 청자와 함께 동경(銅鏡)[구리로 만든 거울]과 개원통보·지도원보·함평원보·경덕원보·상부원보·황송통보·원풍통보·원부통보 등의 중국 동전 39점이 출토되었다.

[현황]

덕천동 유적 터에 북구 실내 빙상 경기장이 건립되면서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덕천동 유적은 좁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분묘와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구 등이 확인되어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고려 시대의 분묘는 고려 시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 주는 주요한 문화재이다. 상감청자는 유약이 정치하게 시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고급품으로서 구포 일대의 고려 중기 지방 세력의 존재 양상 및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중국 동전이 상당 수량 출토되어, 고려 시대의 화폐 경제는 물론 동전을 부장하는 매장 습속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청동 뒤꽂이와 동경 등 여성의 장신구와 화장구와 함께 철제 가위 등이 출토되어 여성의 일상생활 용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자와 도기 및 동전 등은 고려 시대 문화재가 적은 부산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구명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덕천동 유적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고려 초부터 조선 전기까지 경영한 만덕사지(萬德寺址)가 있으며, 이곳에서도 고려청자와 함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덕천동 유적의 조영 집단과 만덕사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분묘는 고려 시대의 분묘에 비해 무덤의 규모도 작고, 출토 유물의 수량과 내용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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