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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파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210
한자 息波樓
영어의미역 Sikparu Pavi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누각
정면칸수 6칸
건립 시기/일시 1629년연표보기 -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703년연표보기 -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35년연표보기 - 중수
원소재지 식파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정의]

조선 후기 부산 동래 읍성 안에 건립된 누각.

[개설]

식파(息波)는 ‘파도를 그치게 한다’는 뜻으로, 파도는 나라의 근심과 걱정, 왜적 등을 의미하였다. 신라 때 신문왕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동래부지(東萊府誌) 제영 잡저(題詠雜著)」에는 동래 부사 이원진(李元鎭)이 1645년에 식파루에 올라 지은 시가 남아 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갈 때 칼을 의지하여 서 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옛날 재앙이 들었던 임진년을 기억하노라. 어찌 다시 부산(浮山)[중국의 지명]의 대나무를 베어내는 일을 당하겠는가? [피리를] 불어 동해바다 만만파(萬萬波)를 그치게 하리라.” 이 시에는 대나무를 쪼개어 화살을 만드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동래 부사다운 비장한 각오가 배어 있다.

[변천]

임진왜란 때 동래 읍성이 함락된 후, 읍성 내의 건물이 많이 파괴되자 새로 부임해 오는 동래 부사는 건물의 신축, 증축, 중건을 서둘렀다. 식파루는 동래 부사인 유여각(柳汝恪)이 임명된 1629년(인조 7)에 동래 객사(客舍)봉래관(蓬萊館) 남쪽에 세운 것이다. 객사 남쪽에 있어서 일명 남루(南樓)라고 불렀다. 이후 1703년(숙종 29)에 동래 부사 이야(李壄)가 중건하고, 1759년(영조 35)에 동래 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동래 읍성 내부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식파루는 흔적 없이 사라져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형태]

식파루는 6칸 규모의 누각이다.

[의의와 평가]

식파루는 동래 읍성을 강건하게 지켜 조선을 굳건히 방어하여 국가의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를 가진 누각이다. 같은 의미로 동래 읍성 외에도 바닷가에 중요한 위치에는 식파루라는 이름의 누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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