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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188
한자 縱長板革綴胄
영어의미역 Iron Helmet Fastened with Leather Straps and Nails
이칭/별칭 몽고발형주(蒙古鉢形冑),종장판주(縱長板冑),수신판혁철주(竪矧板革綴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투구
재질 철제

[정의]

부산에서 발견된 삼국 시대의 전사 머리 보호용 철제 투구.

[형태]

부산 지역의 종장판혁철주(縱長板革綴胄)는 세로로 긴 지판(地板)을 가죽 끈으로 엮어 투구의 몸통을 만들고, 옆에는 볼 가리개를, 뒤쪽에는 뒷목 가리개(首尾部) 매달았다. 지판의 연결은, 정면 중앙에 밑변을 삼각형으로 오린 미간부 지판(眉間部地板)을 맨 위에 두고, 좌우로 눈썹 모양을 만들어 가며 지판을 아래쪽으로 중첩하여 연결을 진행하였으므로 후두부의 중앙 지판은 가장 아래쪽에 놓인다. 투구의 몸통이 완성되면 정수리 부분에 반구형(半球形)의 복발(覆鉢)을 얹는다. 복발은 중앙에 구멍이 있고, 구멍은 철제 관(管)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투구 장식을 위한 술을 다는 장치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은 형태적 특징으로 인해 몽고발형주(蒙古鉢形冑), 종장판주(縱長板冑), 수신판혁철주(竪矧板革綴冑)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종장판혁철주는 지판의 단면이 ‘S’ 자로 만곡하여 휘어지는 만곡 종장판혁철주(彎曲縱長板革綴冑)와 내만하기만 하는 종장판혁철주로 나눌 수 있다. 이 종장판혁철주는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형식의 투구이다.

[변천 과정과 특징]

부산 지역 종장판혁철주의 원류에 대해서는 형태적 유사성으로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수현(楡樹縣) 노하심(老河深) 출토 종장판혁철주에서 구하였던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역적·시기적인 격차가 너무 커 직접적인 연결은 지양하고 오히려 고구려로부터의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즉 만곡 종장판혁철주의 경우는 고구려의 제작 기술에서 원형을 찾아 가장 먼저 나타난 형식으로 보는 반면, 기존의 유기질제(有機質製) 투구가 철제화한 것을 종장판혁철주로 보고 양자 간에는 계통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종장판혁철주의 출현 시기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89호와 울산 중산리 1A-100호 출토품으로 보아 4세기 초로 볼 수 있다. 4세기 전엽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와 56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 10호와 18호에서 종장 판갑과 함께 철제 복발을 갖춘 만곡 종장판혁철주가 성행하며, ‘S’ 자 만곡이 없는 종장판혁철주는 4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부산과 김해 지역에서만 제작되고, 경주 지역은 예를 찾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만곡 종장판혁철주와 종장판혁철주 사이에는 출현 시점과 분포 범위, 종장 판갑과의 동반성 등에서 차이가 있어 계통적으로 분리됨을 알 수 있다. 이후 동일한 변화 과정을 거치나 소유 양상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종장판혁철주의 기술 속성은 다양한데, 우선 지판의 형태를 살펴보면 지판 단면의 ‘S’ 자형 만곡 여부 외에도 20매 이상의 가는 세형 지판으로 구성되는지, 20매 이하의 너른 광형 지판으로 구성되는지로 구분된다. 이들 속성은 시간성을 적극 반영하는데, 시간이 경과할수록 ‘S’ 자형으로 만곡하는 세형 지판을 30~50매로 이어 가는 경향성이 발견된다.

복발은 반구형의 복발과 접시모양의 복판(覆板)이 있으며, 재질에 따라서는 철제와 유기질이 있다. 유기질제의 경우, 남아 있지는 않지만 주체의 상단에 복발과의 연결을 위한 구멍이 있는 것으로, 모든 종장판혁철주의 상부에는 복발 혹은 복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만곡 종장판혁철주에는 반구형의 복발을, 종장판혁철주에는 접시모양의 복판을 씌우는 경향이 많다. 특히 경산 임당 G5호 출토품의 경우는 종장판혁철주에 접시모양의 철제 복판을 가죽으로 연결하여 주목된다.

볼 가리개는 전체적으로 역삼각형 모양을 띠는 지판을 1매 혹은 3매 정도 가죽으로 엮은 지판형, 찰갑의 소찰을 엮은 소찰형, 그리고 유기질제로 되어 남아 있지 않은 경우 등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대체로 4세기대에는 만곡 종장판혁철주와 종장판혁철주에 유기질제든지 지판형 볼 가리개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5세기 전엽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 93호 출토 종장판혁철주를 기점으로 소찰형 볼 가리개로 전환된다. 이는 찰갑 제작 기술의 발전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뒷목 가리개 역시 4세기대에는 종장판혁철주의 후두부 지판을 길게 만들어 뒷목 가리개 역할을 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5세기 전엽 부산 복천동 고분군 93호를 기점으로 소찰형 뒷목 가리개로 전환하여 이후 모든 종류의 종장판혁철주에는 소찰형 뒷목 가리개가 부착된다.

이상과 같은 속성들의 상관관계로 볼 때 만곡 종장판혁철주는 20매 이상의 세형 지판에 철제 반구형 복발을 얹고, 소찰형 볼 가리개와 뒷목 가리개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종장판혁철주는 20매 이하의 광형 지판에 유기질제 복판을 얹으며, 지판형 볼 가리개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전엽까지 종장판혁철주는 제 속성 간의 결합에 일정한 정형성이 깨지면서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만들어진다.

5세기 전엽에 들어서면 한반도 남부 지역의 모든 갑옷이 찰갑으로 전환되고 이전의 지판형 볼 가리개는 소찰형으로 변화하며, 소찰형 뒷목 가리개가 나타나는 중요한 획기를 보인다. 뿐만 아니라 복발 정수리 부분에 구멍을 내거나 내부 혹은 외부에 관(管)을 고정한 철제 복발이 있는 만곡 중장판혁철주로 형식이 일률적으로 통일되어 간다. 따라서 5세기대 종장판혁철주는 4세기대의 그것과 외관상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데, 복발의 높이 차이뿐 아니라 복발에 술을 달 수 있는 장치와 옆 목과 목덜미를 가리기 위한 가리개들의 크기가 더욱 크고 길어져 장대해지며, 주체의 지판 수도 늘어나면서 장식적인 효과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 출토 종장판혁철주는 시기적인 단절성 없이 출현기인 4세기 초엽부터 시작하여 고분에 갑주류의 부장이 감소되는 6세기 전엽까지 고루 출토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고대 갑주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는 고분 매장 의례에 있어서, 갑주류의 부장에 큰 의미를 두는 가야 고분에서 자연스럽게 신라로 이행되었기 때문에 종장판혁철주의 생성과 변화 과정, 퇴화의 전 과정을 한눈에 파악 할 수 있다.

경주 지역을 비롯한 신라 권역에서 4세기대 자료는 울산 중산리 유적 출토품의 몇 사례가 있으나 갑옷과 동반되지 않으며, 전기 가야의 중심지인 김해 지역에서는 4세기대 종장판혁철주의 출토 예는 많으나 5세기대까지 연속되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종장판혁철주의 연구는 부산 지역, 특히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품 자료를 중심으로 선도되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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