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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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五倫臺古墳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s of Oryundae in Bus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175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에 있는 삼국 시대의 분묘 유적.
[위치]
오륜대 고분은 원효산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수영천의 중류 지역에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해발 60m의 나지막한 구릉 정상부와 사면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40년에 회동 수원지[일명 오륜대]가 만들어지고, 1967년에 수원지 확장 공사를 하면서 유적이 수몰되었다. 이후 1971년 수원지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유구가 노출되어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삼국 시대의 구덩식 돌방무덤 29기와 독무덤 1기 등 30기가 조사되었다. 이후 이 유적은 20여 년간 수몰된 상태로 있었고, 1995년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수질 오염 방지 및 저수 용량을 늘려 양질의 원수를 공급하기 위한 이사토 준설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1996년 5월 17일부터 1997년 3월 14일까지 복천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삼국 시대의 분묘 63기, 조선 시대의 수혈 주거지 2동, 석축 3동, 구상 유구 1기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제토 작업을 할 때 마제 석부를 포함한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도 출토되어, 주변에 청동기 시대 유적의 존재 가능성도 확인되었다
[형태]
분묘는 남북쪽으로 연결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 밀집되어 분포하고, 사면에도 분포한다. 총 93기의 분묘 중 널무덤이 6기,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3기, 구덩식 돌방무덤이 84기이다. 조선 시대 이래 이곳이 거주 지역으로 되면서 유구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를 알 수 있는 것은 1기도 없었다. 잘 남아 있는 유구는 3~4단 정도의 벽면이 남아 있었고, 일부의 유구들은 벽석이 모두 제거되어 덧널무덤으로 오인될 정도였다.
삼국 시대의 분묘는 대체적으로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대략 200년간에 걸쳐 조성되었고, 대부분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것들이고, 7세기의 무덤은 3기 정도에 불과하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무덤들은 모두 구덩식 돌방무덤인데, 1971년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구역의 석곽들이 비교적 규모가 크다. 석곽의 규모는 대체적으로 길이가 3~4m이고, 너비가 1m 내외의 세장한 장방형이다. 이들 돌덧널무덤은 길이 방향이 능선 방향과 같은 남북 방향이고, 구릉 위쪽에 만들어진 석곽들은 능선과 직교되는 동서 방향이다.
구덩식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은 규모가 큰 유물들은 북쪽 단벽 가까이에 부장하고, 작은 유물들은 남쪽 단벽 가까이에 부장하였다. 그리고 인골이 발견된 유구는 1기도 없으나 고리 자루 큰 칼이 출토된 유구의 경우, 고리 자루 부분이 북쪽으로 놓여 있는 것을 참조할 때 머리 방향은 북쪽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물 중에 꺾쇠나 관정이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신을 보호하는 목관 또는 그 외의 다른 보호 장구 없이 시신을 매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구덩식 석곽 외에도 시신을 토광에 아무런 시설이 없이 바로 매장한 널무덤은 길이가 3m를 넘지 않고, 너비가 50~60㎝ 내외이다. 토광의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고, 그 규모는 수혈식 석곽보다 작다. 대부분 상부가 삭평되어 아주 얕게 남았다. 바닥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이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널무덤의 시기는 6세기 전반이며 구덩식 돌방무덤과 같은 시기의 것이다.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모두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구조를 알 수 없다. 석실은 큰 냇돌을 가로눕혀쌓기를 하였고, 바닥에는 사람 주먹 크기만한 크기의 냇돌을 한두 겹 깔아 시상(尸床)을 만들었다. 앞트기식 돌방무덤에는 1회의 추가 매장이 된 것과 추가 매장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있다.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북쪽 가장자리에 있으며, 북쪽 지역의 조사되지 않는 곳에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볼 때, 7세기 후반에 조영되었다.
[출토 유물]
삼국 시대의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약 450여 점으로, 토기류, 철기류 등이다. 토기류에는 굽다리 접시[고배(高杯)]가 대부분이며, 이외에도 굽다리 긴 목 항아리[대부 장경호(臺附長頸壺)], 자루 달린 항아리[파수부 옹(把手附甕)], 연질 옹(軟質甕) 등이 있다. 토기 기종의 구성상 특징으로는 거의 모든 유구에 연질 옹이 매납되었고, 일부의 석곽에는 5~6점이 매납되었다. 그리고 고배류는 거의 대부분이 유개 고배(有蓋高杯)이고, 6세기의 유개 고배는 고배와 뚜껑에 종밀 집선문(集線紋)이 있다. 철기류로는 주조 철부(鑄造鐵斧)[도끼나 끌]와 단조 철부(鍛造鐵斧), 쇠낫, 쇠화살촉, 큰 칼 등의 농공구류와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68호 수혈식 석곽에서 말 발걸이[등자(鐙子)] 1짝이 출토되었다. 철부와 쇠낫은 대부분의 유구에서 출토되었으나, 큰 칼과 쇠화살 등의 무기류는 매우 적게 매납되었다.
[현황]
회동 수원지의 물속에 잠겨 있어 평소에는 볼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오륜대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 형성되어, 부산의 중심 고분군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의 지배 세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에 들어와서 인접한 두구동 임석 고분군과는 묘제와 고분군 배치, 출토 유물 등에서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보아 부산 오륜대 고분군은 소형 묘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며,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이 느리고 보수성이 강한 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