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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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侵入 |
영어의미역 | Invasion of the Japanese |
이칭/별칭 | 왜적 침입,왜병 침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근우 |
[정의]
삼국 시대에 왜(倭)가 부산 지역을 침입해 온 사건.
[개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 때부터 왜의 침입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5세기 대에는 17차례에 걸쳐서 왜가 침입해왔다. 심지어 경주 지역의 명활성, 금성, 월성을 공격하거나 포위하는 일도 있었고, 실성왕(實聖王) 대에는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고 또 왜인(倭人)이 병영을 설치하였다는 이유로 대마도를 정벌하려고 한 적도 있으므로, 내물왕(奈勿王) 이후 신라의 성장 과정에서 왜가 큰 변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왜가 침입해 온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을 노략질한 경우[407년(실성 6)·462년(자비 5)], 가축을 노략질한 경우[440년(눌지 24)], 성을 함락시킨 경우[500년(소지 22)]가 있지만 대부분은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왜에 관한 기사는 왜국(倭國)·왜왕이라고 한 경우와 왜인·왜병(倭兵)이라고 한 경우로 나눌 수 있고, 왜국은 외교적인 상대국으로, 왜인과 왜병은 침입해오는 주체를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300년(기림 3)에 왜국과 교빙하였다고 하였고, 402년(실성 1)에 왜국과 통호하고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312년(흘해 3)에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을 위하여 구혼하므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으며, 344년(흘해 35)에도 왜국이 혼인을 청한 바가 있다. 이어서 345년(흘해 36)에 왜왕이 글을 절교하였다. 이처럼 왜국으로 나타나는 기사는 교빙(交聘)·통호(通好)·혼인 등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이에 대해서 왜병 왜인은 모두 신라를 침입해 온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왜의 성격에 대해서 신라계 왜와 백제계 왜로 나누고 전자[왜국]는 기비[吉備]·이즈모[出雲], 후자[왜병·왜인]는 규슈[九州]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석형]를 비롯하여, 왜국·왜병·왜인은 동일한 실체이며 해적 집단으로 보는 견해[기전외(旗田巍)], 일본 열도의 야마토 왕권[大和王權]과는 무관한 가야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으로 보는 견해[정상수웅(井上秀雄)], 북부 규슈 지역의 왜인으로 보는 설[선석열] 등이 있다.
왜국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단서가 되는 것은 박제상(朴堤上)에 관한 여러 문헌의 기록이다. 왜에 인질로 간 미사흔의 경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미질허지(微叱許智)로 이름이 보인다. 신공기(神功紀) 5년조에 따르면 신라왕이 우례사벌(汚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박제상],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인질로 온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돌려보내고자 하여, 미사흔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신라왕이 미사흔의 처자를 노예로 삼았다고 왜왕을 속였다. 이에 가츠라기 소츠히코[葛城襲津彦]라는 인물을 딸려 보냈다. 대마도에 이르러 서해수문(鉏海水門)에 머물렀는데 이때 미사흔이 몰래 배를 타고 도망쳤다. 이에 박제상 등을 태워 죽이고 도비진에 진을 치고 초라성(草羅城)[양산]을 공격하고 돌아왔다. 이때 잡아온 사람들이 열도의 4곳의 한인(韓人) 등의 시조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백제인으로 전에 왜에 들어간 자가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왕의 나라를 도모하려고 참소하였으므로,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하게 하였는데,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을 포로로 삼고 죽이므로, 왜왕이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여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임명하고 향도로 삼아 해중의 섬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때 백제인은 당시 왜에 가있던 백제의 태자 전지(腆支)이고 해중 산도는 바로 대마도이다.
또한 이 기사 속의 소츠히코라는 인물을 왜왕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실존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가츠라기는 야마토 분지 안에서 동쪽 사면에 위치한 곳이며 소츠히코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호족 세력이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실제로 한반도계 도래인의 생활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가 머무른 도비진은 부산의 다대포로 추측되는데, 이곳에서 초라 즉 양산을 공격하였는데, 이 시기는 아직 부산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당시 상황과 부합된다. 또한 박제상이 원래 ‘삽량주간(歃良州干)’[『삼국사기』], ‘삽라군태수(歃羅郡太守)’[『삼국유사』]였으므로, 왜가 공격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신라가 미사흔을 인질로 파견한 왜국은 야마토 지역의 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를 공격한 왜가 단일한 실체가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402년(실성 1)에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는데, 405년(실성 4)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해 왔고, 실성이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300여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이는 실성이 인질을 보낸 왜국과 신라를 쳐들어온 왜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국은 인질을 보낸 신라를 공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공격해 왔더라도 신라로서도 300명을 죽이는 데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왜를 단일한 실체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있다.
[경과]
실성왕이 왜인들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비축하여 신라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를 통해서 신라를 공격하는 왜인들이 대마도를 거쳐서 오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즉 신라로서도 미사흔을 인질로 보낸 왜국과 신라를 침입해오는 왜인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병기와 군량을 비축하였다는 것을 보면, 단순한 해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많게는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간 점에서도 해적의 행위는 아니다.
또한 왜가 명활성·금성·월성을 공격한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분명히 정치적 군사적인 의도를 가진 것이며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행위이다. 그러나 왜로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를 멸망시켜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 당연히 신라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세력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대에 신라는 동북쪽으로 실직, 하슬라로 진출하였고 서북쪽으로는 삼년산성 등 많은 성을 쌓아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기록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 시기에 신라는 가야 지역으로도 세력을 뻗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가 경주 지역에 침입한 것은 신라의 영역 확장이라는 위기에 직면한 가야가 철 등의 선진 문물을 공여하는 대가로 신라를 공격하도록 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가야로서는, 이전부터 철의 교역 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왜의 병력을 끌어들여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경주 및 주변 지역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면서 점차 왜의 공격로가 제한되고 주로 양산 등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도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 경로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경주 지역이나 주요 거점을 공격한 왜는 가야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북부 규슈의 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변경을 침략해 온 왜인들 중에는 식량을 구하거나 각종 물품을 약탈하려는 해적에 가까운 경우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물왕 이후 소지왕 대까지 왜와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통호·교빙·혼인 관계를 맺은 왜국은 야마토 정권이며, 금성·명활성·월성·삽량성·장봉진 등을 포위·공격하고 함락시킨 왜병·왜인은 분명한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가야와 관련을 갖고 있는 규슈의 왜이며, 단순히 ‘범변(犯邊)’이라고 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단순한 약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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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신라가 부산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전까지는 왜의 침입을 받았을 가능성이 적다. 실제로 일본 열도의 하지키계[土師器系] 토기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상황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5세기 중엽 경에는 부산 지역에서 가야 문화가 쇠퇴하고 신라의 영향이 강하지고 후반에 이르면 토기와 묘제에서도 신라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463년(자비왕 6)에 왜인들이 삽량성을 공격하는 등 영토를 침략하자 변경에 두 성을 쌓았으며, 493년(소지왕 15)에 임해와 장령 2진을 두어 왜적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사는 양산보다 더 바다 쪽의 변경에 성이나 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양산과 바다 사이에 연결하는 지역 중에서 중요한 지점은 동래와 기장이었다.
동래는 거칠산국·내산국·장산국이라고 하였고 현재도 장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거칠산과 황령산에서 볼 수 있듯이 ‘령(嶺)’과 ‘산(山)’은 서로 통용되므로, 양산으로 가는 길목에 주요 거점인 동래가 장령진·장봉진일 가능성이 있다. ‘장(萇)’이라는 글자는 『삼국사기』에서는 한 차례로 쓰이지 않았으므로 현재 ‘장산(長山)’이라는 지명과 마찬가지로 ‘장(萇)’ 대신 ‘장(長)’으로 표기했을 수 있다. 임해진 역시 지리적인 중요성을 생각하면 기장 방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인들이 498년(소지왕 22)에 장봉진을 쳐서 함락시켰다고 한 것은 동래 지역에 새롭게 설치된 신라의 방어 거점을 공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5세기 중엽까지 신라의 남변에 대한 왜의 침입은 주로 부산과 인접한 양산 방면에 집중되었다. 한편 김해의 가라국이 쇠퇴하면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신라의 영향이 나타나고 5세기 후반부터 연산동 고분군이 축조된다. 이러한 변화는 부산 지역으로 신라가 진출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신라의 부산 지역 진출은 왜가 가야와 연합하여 양산을 비롯한 신라의 남변을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복천동 세력을 가야로부터 분리시키고 한편으로 왜의 공격을 막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