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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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福泉洞古邑城- |
영어의미역 | Site of Goeupseong Fortress in Bukchdon-dong |
이칭/별칭 | 복천동 고읍성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0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형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동래읍성의 터.
[개설]
고려 말에 왜구들이 자주 침입할 때 동래현도 여러 번 침입을 받자 1387년(우왕 13) 원수(元帥) 박위(朴葳)가 바다와 가까운 지금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일원의 해운포에 있던 동래읍성을 대신할 새로운 성의 필요성을 느껴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원에 동래읍성을 쌓았다.
[변천]
1387년 8월부터 한 달 남짓 걸려 건립한 동래읍성은 1446년(세종 28) 석성(石城)으로 증축되면서 1438년(세종 20) 반포된 「축성 신도(築城新圖)」에 따라 성벽의 폭이 넓어졌다. 동래읍성에는 1452년(단종 1) 충청·전라·경상도 체찰사 정분(鄭苯)의 요청에 따라 해자(垓字)를 팠고, 임진왜란 바로 전에도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고치는 등 몇 차례 보수를 거쳤으나 임진왜란 때 많이 허물어졌다. 이후 동래읍성은 부분적으로 보수되다가 1731년(영조 7)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성을 여섯 배 이상으로 증축할 때 위치가 남문과 서문 주변은 비슷하나, 나머지 성문 주변은 크게 확대된 읍성 안에 놓이게 되었다.
[위치]
복천동 고읍성 터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04번지 일원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동래읍성의 중심지였던 동래 객사[현재의 동래 시장 상가]에서 서북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주택 건설을 추진하기 전에 2002년 9월부터 11월까지 복천박물관이 매장 문화재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발견된 유구는 1446년 동래 현령 김시로(金時露)가 쌓은 둘레 927m, 높이 3.9m 규모의 석축 성벽이 잘 남아 있는 기초 다짐석·지대석·기단석 등과 성벽 외벽에 덧대어 지은 후대의 건물 터, 청동기 시대의 환호(環濠)로 추정되는 수혈(豎穴)[땅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 등이다. 유물은 성벽 돌 사이에서 주로 출토된 분청사기편 및 백자편, 뻘 층에서 나온 도기편·기와편 등이 있는데, 분청사기 인화문 대접편 중에서 ‘경(慶)’, ‘고(庫)’ 등의 명문이 있어 주목된다. 청동기 시대의 환호 유구는 단면이 W자 형인데, 성벽 돌로 인해 잘린 형태로 남아 있고, 주변에서 많은 미완성 석제품과 민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현황]
발굴 조사에서 성벽이 있던 곳은 유구의 원형 보존을 위해 대부분 복토하였다. 관람객들이 성벽의 양쪽 끝과 중간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도록 16곳에 가로 세로 1m 정도 크기의 특수 유리를 덮어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2층부터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때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역사 현장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무너진 뒤 1731년에 성이 크게 확장되면서 처음으로 그 존재가 확인된 유적이다. 남부 지역의 고려 시대 읍성이 기단을 돌로 쌓은 후 판축한 토성인 데 반해, 고려 말 동래읍성의 외벽은 돌로 쌓았지만 내벽은 흙으로 쌓아 성곽의 발달 과정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