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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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倭城- |
영어음역 | Dongraewaeseong-teo |
영어의미역 | Site of Dongrae Japanese Castle |
이칭/별칭 | 동래왜성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2|안락동 2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및 안락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축조된 왜성 터.
[개설]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에는 “증산(甑山)은 동래부 동쪽 2리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인(倭人)이 성을 쌓고 수비했는데, 지금[영조 16년(1740)]은 반이나 허물어졌다. 성 위에는 장대(將臺)가 있으며 아래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이 동래 왜성으로 조선 후기 동래읍성을 축성한 직후에는 동래 왜성의 흔적이 잘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래 왜성은 조선 후기 축조된 동래읍성의 동장대(東將臺)를 중심으로 충렬사 경내 대부분으로 현 동래읍성의 동남쪽에 해당된다. 임진왜란 당시 요시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가 축성·수비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동래를 비롯하여 해운대, 기장, 구포가 한눈에 조망되는 지역으로 당시 온천천과 수영강을 통하여 바다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동장대를 중심으로 하여 가운데 골짜기를 두고 서남쪽으로 하강하여 시내로 내려가는 동래읍성의 성벽과 동남쪽의 능선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곳곳에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위치]
동래 왜성의 중심부는 동래구 칠산동 산2번지에 있는 동래읍성 동장대를 중심으로 동남쪽 능선이 이어지는 충렬사 정문까지 범위에 들어가며, 동래 왜성의 외곽부는 동래구 안락동 20번지에 있는 에스뻬랑스 예식장 주변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대체로 동래읍성의 안쪽에 해당되는 서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루고, 60m 지점의 동쪽에는 수직상(垂直狀)의 해자[수굴(竪堀)] 서너 곳이 확인되며 서북쪽에는 큰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동장대가 복원되어 있는 곳이 동래 왜성 중심부의 본환(本丸)[왜성 내에서 중심이 되는 공간]였던 곳에 해당되며, 북쪽으로 연결된 능선에 소규모의 공간[소곡륜(小曲輪)]이 단을 이루며 연속되어 있다. 정상부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치성(雉城)[성벽에 붙은 적을 사살하기 위하여 원형이나 방형으로 성벽에 붙여 쌓은 성]이 있는데, 치성의 동북쪽으로 동래 왜성의 벽이 시작되는 부분에도 폭 5~8m의 V자 형의 수직 해자 3곳이 확인된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지도를 보면 안락 로터리 서남쪽 작은 언덕에도 외곽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1568년을 일컫는 융경 2년 명(隆慶二年銘)의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 왜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거성(居城)인 구마모토[熊本]의 무기시마죠[麥島城]에서 출토된 막새기와와 동일한 와범(瓦笵)[기와 제작 틀]으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당시 이곳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기와를 모본(模本)하여 일본 성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황]
동장대의 북쪽에는 3~4개의 곡륜(曲輪)이 확인되며 동쪽으로는 수굴 3곳이 확인된다. 동장대의 남쪽 군관청 쪽으로도 단상(段狀)의 곡륜이 다수 확인되며,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도 가늘고 긴 곡륜이 양호하게 남아 있다. 외곽부의 경우는 교회를 비롯한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중심부가 있었던 동장대 주변의 왜성 벽은 조선 후기 동래읍성을 신축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그동안 그 소재조차 확인되지 않았으나, 토축(土築)의 곡륜이 충렬사 내에 대부분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동장대에서 출토된 막새기와를 보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도자기뿐만 아니라 기와까지도 약탈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으며, 일본 내 막새기와의 변천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