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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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美卿 |
영어음역 | Gwon Migyeo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산로 140[신평동 49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일래 |
[정의]
부산 지역에 있는 (주)대봉의 부당한 노동 현실에 항거하여 투신자살한 노동자.
[가계]
권미경(權美卿)은 1969년 6월 24일 아버지 권씨와 어머니 박영애의 1남 3녀 가운데 큰딸로, 전라남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오빠 권홍기와 여동생 권미자, 권혜경이 있다.
[활동 사항]
권미경은 1971년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하여, 1982년 아미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완구 공장에 다니던 홀어머니와 노동일을 하는 오빠, 밑으로 두 동생을 둔 권미경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생업에 뛰어 들었다. 1982년 3월 보세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던 권미경은 학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동주여자중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1985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권미경은 대일산업, 청산, 세원, (주)대봉 등의 회사에서 일하였다.
1991년 봄 사하구 감천2동에 있는 지역 노동자들의 독서 모임인 ‘광장도서원’에 나가면서 권미경은 노동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광장도서원 노동 분과에서 그는 배움의 갈망을 해소하고 자신의 사회적 존재에 대해 새로이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권미경이 광장도서원에 큰 애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 그는 일기장에 “오랜 세월 애타게 갈망해 오던 그런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 바로 이곳 ‘광장’에. 그들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다.”[1991년 5월 7일]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권미경이 몸담고 있던 부산의 신발 산업은 무더기 도산 사태를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국내에 있던 기업은 노동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이 때문에 신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매우 악화되었다. 1991년에는 어용 노조의 협력을 받은 사업주들이 ‘구사 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상여금 반납’, ‘토요일 연장 근무’, ‘30분 더 일하기’ 등의 방법으로 노동 착취를 자행하였다. 노동자들은 ‘원가 절감, 결근 방지’라 적힌 깃을 달고 일하면서도, 관리자들의 폭언과 욕설에 시달려야 하였다.
이 무렵 권미경은 사하구 신평동에 있는 신발 제조업체 (주)대봉에서 일하고 있었다. (주)대봉은 사원 3,500여 명 규모의 내수와 수출을 겸한 회사였다. 권미경이 일하던 시절 (주)대봉에서도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고,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과 노동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991년 12월에 들어서면서 (주)대봉의 노동 강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연장 근로를 강요하고, 작업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정신 교육과 함께 강제적으로 잔업을 시켰다. 노동자들은 훈시를 듣느라 저녁 식사도 못하고 잔업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여느 신발 공장과 마찬가지로 대봉에서도 관리자가 노동자를 부를 때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권공순’, ‘박공돌’ 등으로 부르면서 비인간적인 취급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권미경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1991년 12월 6일 오전 권미경이 근무하는 1계 3조로 바이어가 품질 검사를 나왔는데, 마침 야간 학교를 다니던 최미숙이 불량을 냈다. 이것을 목격한 바이어가 관리직 사원을 질책했고, 바이어가 사라진 후 조장과 반장이 최미숙을 심하게 야단쳤다. 이를 목격한 권미경은 큰 충격을 받았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느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냐.”고 울먹였다. 그리고 오후 4시 8분경, 권미경은 살인적인 노동 통제에 항거하며, 회사의 옥상에서 30m 아래로 몸을 던졌다.
고신의료원에 옮겨졌을 때 권미경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권미경은 유서가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왼팔에 유서를 새겨 놓았는데,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 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유서는 이 땅 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하는 외침이었다.
부산 지역 11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고무 노동자 고 권미경 양 사인 규명 대책위원회’는 권미경의 죽음과 관련한 의문점을 조사·규명하는 한편,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구사 운동을 철폐하기 위한 규탄 집회를 이어 갔다. 권미경의 장례는 12월 22일 ‘부산 노동자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죽음은 이후 1992년 4월 5일 ‘고무노동자협의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어 신발 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번지의 솥발산 공원묘원에 있으며, 그의 유서 전문이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