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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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鍾哲 |
영어음역 | Bak Jongch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산10-1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성환 |
[정의]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부산 출신의 학생 운동가.
[가계]
박종철(朴鍾哲)은 1965년 4월 1일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정기는 경상남도 출신으로, 6·25 전쟁을 전후한 무렵 해인대학교[현 경남대학교] 재학 중 지리산의 유격대에게 징발되었으나 용케 탈출한 적도 있다. 전쟁 후 박정기는 부산시 수도국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정년퇴임까지 근무하였다. 슬하에 큰아들 박종부, 큰딸 박은숙, 둘째 아들 박종철을 두었다.
[활동 사항]
박종철은 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영남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남제일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에 부마 항쟁이 일어났다. 박종철은 학원 수강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과 함께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마 항쟁의 경험은 그에게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2월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종철은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박종철은 사회사상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하여 학생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1985년 5월에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서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지원 시위에 참가하여 구류 5일을, 6월에는 가리봉동에서 노학 연대 투쟁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 3일을 살았다.
1985년 8월 박종철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공장 생활을 체험하는 활동을 하며 노동 운동에 투신할 준비도 하였다. 1986년 4월 11일에는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구속되어 1986년 7월 15일 출소하였다. 이후에도 박종철은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1987년 1월 13일 자정 무렵에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들 수사관들은 서울대학교 학생이자 박종철의 선배인 박종운[현 한나라당 부천 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의 행방을 추궁하며,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에게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결국 박종철은 고문을 받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수사관들이 1987년 1월 14일 11시 20분경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1987년 범국민적 항쟁으로 전개된 6월 민주 항쟁의 불씨가 되어, 이 땅 민주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 공원 민족 민주 열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7년 이후 매년 1월 14일에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주최로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2008년 6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죽은 치안본부 대공 분실의 고문실을 보존하여 경찰청 인권센터로 명명하고 기념관을 조성하였다. 1997년 6월 서울대학교 교내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2004년 5월 18일 혜광고등학교 교내에도 추모비를 건립했으며, 2010년 6월 10일 부산 민주 공원에 추모석을 설치하였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1998년에 박종철 평전 『그대 온몸 깃발 되어』를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