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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99
한자 陳聖一
영어음역 Jin Seongil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314-7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 열사
성별
대표경력 부산산업대학교 행정학과 학생
출생 시기/일시 1964년 1월 2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82년 2월 - 동래고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82년 3월 - 부산산업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84년 - 군 입대
활동 시기/일시 1985년 말 - 민정당 부산시당에 부정 선거 항의
활동 시기/일시 1986년 3월 - 부산산업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복학
활동 시기/일시 1986년 봄 - 노동 운동 투신 시도
활동 시기/일시 1986년 11월 4일 - 분신
몰년 시기/일시 1986년 11월 5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7년 - 진성일추모사업회 주최로 추모 행사 개최
추모 시기/일시 1987년 11월 4일 - 부산산업대학교 교내에 추모비 건립
출생지 부산광역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고등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60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부산산업대학교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314-79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산업대학교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314-79지도보기
추모비 경성대학교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 314-79지도보기

[정의]

1986년 부산산업대학교에서 분신자살한 민주 열사.

[가계]

진성일(陳聖一)은 1964년 1월 26일 부산에서 아버지 진승국과 어머니 조동래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진승국이 부산산업대학교[현 경성대학교] 직원이어서, 진성일의 가정은 비교적 여유 있는 중산층에 속하였다.

[활동 사항]

진성일은 1982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산업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1984년 군대에 입대했던 진성일은 군대에서 사회 부조리를 처음 깨닫게 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대 내에서 광범위한 부정 선거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투표를 앞두고 군 지휘부는 장교들에게 민정당 지지와 민정당의 특정인에 대한 편파적인 흑색선전과 학습을 강요했고, 부재자 투표 당일에는 장병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켜 민정당 지지를 강요하였다. 또한 투표 직후에는 야당에 표를 준 장병들을 문책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진성일은 1985년 말 마지막 휴가를 나와 민정당 부산시 당사를 찾아가 군대 내의 부재자 투표의 부정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직자들에게 “군번을 적겠다.”, “영창에 가고 싶냐?”는 등의 협박과 폭언만 듣고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그는 군부 독재의 횡포에 깊이 분노하게 되었다.

1986년 군대를 제대하고 3학년에 복학한 그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동양고무에서 발생한 여성 노동자 부당 해고 사건을 접하고 진성일은 노동 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부산진구 부암동에 자리한 동양고무는 직원 8000명이 근무하는 신발 공장으로, 평소 강제 노동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동양고무 노동자들은 1986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4차에 걸친 임금 인상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회사와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진성일의 노동 운동 투신 결심은 아버지와 가족의 만류로 중단되었고, 진성일은 학업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진성일은 가족의 기대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괴리 속에서 깊은 갈등에 빠져들었다. 그런 진성일에게 1986년 10월 28일의 건국대 사건[일명 건대 항쟁]은 결정적인 충격파를 던졌다. 건국대 사건이란 전국 29개 대학에서 2000여 명의 학생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결성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약칭 애학투련] 발대식에 3000여 명의 경찰이 2대의 헬리콥터를 투입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진압 과정에서 학생 1525명을 연행하고 이중 1289명을 구속하였으며, 이 가운데 398명을 기소함으로써, 단일 사건으로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기소자를 기록한 사건이다.

건국대 사건을 접하고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 등에서는 항의 시위와 농성 등 저항이 있었으나, 당시 부산산업대학교 총학생회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고 오히려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구타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진성일은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을 공산 혁명 분자의 난동이라고 왜곡 보도하는 언론과 침묵을 지키고 있는 부산산업대학교 학우들에게 죽음으로써 경종을 울리기로 결심하였다. 마침내 1986년 11월 5일 진성일은 ‘건국대 농성 사건에 즈음하여’, ‘산대 학우에게’라는 제목의 유서를 뿌리고 부산산업대학교 시청각관 5층 옥상에서 분신,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상훈과 추모]

진성일이 사망한 이후 진성일추모사업회 주최로 매년 추모 행사가 개최되고 있으며, 1987년 11월 4일에 부산산업대학교 교내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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