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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영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92
한자 皇甫永國
영어음역 Hwangbo Yeonggu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산10-1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 열사
성별
본관 영천(永川)
출생 시기/일시 1961년 9월 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73년 2월 - 당감초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76년 2월 - 중앙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77년 - 성지공업고등학교 2년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방위병으로 입대
활동 시기/일시 1987년 - 울산 현대중공업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부산 삼화고무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부산 태화고무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우성사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87년 5월 17일 - 서면 부산상업고등학교 앞에서 분신
몰년 시기/일시 1987년 5월 25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0년 - 부산 민주공원에서 추모 행사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10년 - 추모비 건립
출생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학교|수학지 당감국민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1동 271
학교|수학지 중앙중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682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성지공업고등학교 -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산38-1지도보기
활동지 부산광역시
부산 민주공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10-16지도보기

[정의]

부산 출신으로 1987년 전두환 정권 퇴진과 민주 헌법 쟁취를 요구하며 분신 자결한 노동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1961년 9월 6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아버지 황보문수와 어머니 이순이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보문수의 출생지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덕하리이다. 황보문수는 6·25 전쟁 중 군에 복무했으며, 군대를 제대한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울산 방어진에서 노동자 생활을 잠시한 후 20대 초반 부산 당감동으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황보영국은 1973년 2월 당감국민학교[현 당감초등학교], 1976년 2월 부산중앙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76년 3월 성지공업고등학교[현 성지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재학 중인 1977년 9월에 자퇴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고, 1979년에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 이후 1987년까지 울산 현대중공업, 부산 삼화고무태화고무, 우성사 등에서 연강판, 전기 용접, 중장비 운전 등의 기술을 익히면서 근무하였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朴鐘哲) 고문치사 사건으로 2월 7일 전국적인 추도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황보영국도 추도 대회에 참여하였다. 이날 황보영국은 10여 명의 시위 참가자와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영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때 유치장 내 텔레비전에서는 북한에서 일본을 거쳐 남한으로 넘어온 김만철 일가에 대해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황보영국은 이를 보고 “국민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저 군부 파쇼 정권과 이들을 비호하는 저 어용 언론에 대해 내 목숨으로 항의하겠다”고 외치며 허리띠로 올가미를 만들어 목에 끼워 넣으려 하였다. 이때 함께 구금되어 있던 교사 하성원이 허리띠를 빼앗아 말리며, “이렇게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 분노할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라고 설득하였다. 황보영국은 하성원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조국이 민주화되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제물이 되어 목숨을 바치겠다.”고 진지하게 다짐하였다. 그는 2·7 추도 대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주일간 구류를 살고 나왔다.

그 해 4월 13일 전두환(全斗煥)의 4·13 호헌 조치 발표는 민주화 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고, 5·18 민주화 운동 7주년을 맞은 5월 17일 부산에서는 호헌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날 황보영국은 영도경찰서 유치장에서 품었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오후 3시 석유통과 성냥을 가지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오후 4시 47분경 서면 부산상업고등학교[현 롯데 백화점 자리] 옆 인도에서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후 ‘독재 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 책동 저지하고 민주 헌법 쟁취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복개천 위로 100여m를 달리다 귀거래 식당 앞길에서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면서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절규하며 혼절하였다.

이때 현장 주위에 서 있던 전투 경찰들은 이를 보고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나, 주변 식당의 아주머니들이 소방 호스를 들고 나와 옷을 덮고 물을 끼얹어 불을 끈 후, 119 긴급 구조차로 백병원으로 이송하였다. 당시 그는 전신 3도, 90% 화염 화상을 입어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황보영국은 백병원 811호 중환자실로 옮겨져 붕대로 칭칭 감긴 상태에서도 손을 꿈틀거리며 ‘독재 타도’를 신음처럼 외쳐,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병원 안팎에는 경찰 1개 중대가 배치되었고, 병실 앞에는 사복형사가 지키며 병원 측과 합세하여 면회 사절 표지를 걸어 놓았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부, 변호사, 재야인사 등 외부 인사를 통제하면서 면회 시간을 단 몇 초로 제한하는 등 분신을 은폐하기 위하여 혈안이 된 모습이었다. 또한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받은 가족은 자식의 분신 원인을 밝히려 하기는커녕 끝까지 함구하여, 찾아간 사람들을 답답하게 했다.

외부와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황보영국은 쥐어짜듯 신음처럼 ‘독재 타도’를 외치며 홀로 몸부림치다가 25일 새벽 5시 숨을 거두었다. 경찰은 황보영국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가족에게 강요했고, 이에 가족은 공포감을 느껴 26일 오전 9시 당감동 화장막에서 화장하고 근처 산에 유골을 뿌렸다. 그의 죽음 이후 아버지 황보문수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통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묘소]

화장을 하고 묘소를 조성하지 않아 묘소가 없다.

[상훈과 추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 회복과 보상을 신청하여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2000년부터 부산 민주 공원에서 매년 6월 민주 항쟁 기념일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2010년 부산 민주 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6.14 중,고교 입학 및 졸업년도 수정 중학교 졸업년도, 고교 입학년도 및 자퇴년도 수정. 중학교 졸업 : 78년->76년 고교 입학 : 78년 -> 76년 고교 자퇴 : 79년 -> 77년 9월
2017.06.13 국민학교 졸업 년도 수정 1975년 -> 1973년 중학교 졸업년도(1976년 2월), 고교 입학년도(1976년 3월), 고교 자퇴년도(1977년) 등의 수정 요청도 있었으나, 국민학교 졸업년도에 대한 증빙자료만 확인 가능할 뿐, 이외 사항은 추정 사항인 관계로 국민학교 졸업년도만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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