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86 |
---|---|
한자 | 李誠熙 |
영어음역 | Yi Seunghee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진연로 15[양정2동 157-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성환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 운동가.
[가계]
본관은 인천(仁川). 1958년 9월 10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 493번지에서 아버지 이기성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김미현과 결혼하여 딸 이민하, 아들 이동엽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성희(李誠熙)는 1977년 3월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80년 해운대구에 있는 천주교 마산교구 반송성당에서 운영하는 대건야학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1982년 부산야학협의회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초대 의장을 지냈다.
졸업 후인 1986년부터 2년간 영남산업연구원 사무국장을 지내면서 노동자 소모임을 결성하고 교육에 참여하여 노동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89년부터는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는 일꾼도서원의 대표 및 기획 담당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1990년 1월 이른바 용공 유인물인 「바른 삶」을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6월, 집행 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이후에도 ‘늘푸른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의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주민 운동과 지역 환경 운동 및 통일 운동을 펼쳐나갔다. ‘낙동강 살리기 위천공단 저지 부산경남총궐기운동본부’의 총무위원장, 황령산 온천개발 저지 범시민대책기구 특별위원장 등을 지내며 환경 운동에 앞장섰고, ‘해운대를 사랑하는 모임’의 사무국장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지역 주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98년 5월부터 ‘작은이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행위원장을 겸임하고, 북녘 동포 돕기 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이성희는 민주화 운동, 야학 운동, 시민 운동, 노동 운동, 환경 운동, 통일 운동 등 사회 운동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한 시대의 시대정신에 투철하면서도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1999년 11월 ‘삼성차 재가동 및 SM5 판촉 시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부산대학교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노동자와 야학 학생, 환경 단체 회원 등을 위한 다양한 팸플릿과 교육 자료 등을 작성했으나 별도의 저술 및 작품은 남기지 않았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번지의 솥발산 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6년 부일 환경 대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11월 18일 부산 지역 시민 사회 단체 공동으로 부산 최초의 ‘부산민주사회단체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0년 11월 18일 해운대 신시가지를 가꾸는 모임, 작은이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관한 1주기 추모 행사가 해운대 대천 공원에서 열렸다. 사후인 2003년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 2004년 11월 함께 야학 운동을 했던 지인들이 솥발산 공원묘원에서 5주기 추모 행사를 여는 등 생전의 동지와 지인들이 마련한 추모 행사가 매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