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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11
한자 李壽康
영어음역 Yi Suga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12년 8월 26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6년 3월 - 재오사카 가덕인친목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가덕인청년부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62년 12월 27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2년 10월 - 이수강 흉상 건립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42년연표보기 - 가덕인청년부회 사건
출생지 가덕도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일본 오사카
활동지 재오사카 가덕인친목회 - 일본 오사카
활동지 가덕인청년회 - 일본 오사카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47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기념비 이수강 흉상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수강(李壽康)[1912~1962]은 1912년 8월 26일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눌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6년 3월 중순경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동향인 김근도(金根道)·김성규(金成圭)·이수용(李守龍) 등과 함께 재오사카 가덕인친목회[在大阪加德人親睦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수강은 재오사카 가덕인친목회에서 동지들과 함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정책을 비판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등 민족의식을 길렀다.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재오사카 가덕인친목회가 해산되자, 다시 김근도·김성규·이수용·강신화·김봉천 등과 비밀리에 회합하여 1938년 무렵 가덕인청년부회(加德人靑年部會)를 결성하였다. 가덕인청년부회는 겉으로는 상호 친목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민족 독립 의식 고취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였다. 이수강은 동지들과 조선 독립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토의하고, 중일 전쟁의 장기화로 일본에서 내란이 일어나면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처럼 재일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2년 12월 27일에 부산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애국 지사 제3묘역-47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1992년 10월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낙동강 제방에 이수강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흉상의 비문에는 “갓난 첫 울음이 겨레의 목소리면 가덕 앞바다 물결은 숨쉬는 조국의 자장가였다. 원수들 땅 하늘 아래서 겪은 설움과 눈물은 곧 조국 사랑의 불꽃돼 가슴안에 타올랐다. 비록 반백일생이 짧다 하나 맥맥한 핏줄 속에 혼으로 산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http://www.bsgangseo.go.kr)
  • 국립대전현충원(http://www.dnc.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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