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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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印刷職工總罷業 |
영어의미역 | General strike of the pressmen in Bus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철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인쇄직공조합 노동자들이 부산인쇄동업조합에 맞서 일으킨 대규모 파업.
[역사적 배경]
1920년 이후 소강상태를 보였던 파업 투쟁은 1923년 들어 메이데이 투쟁을 시작으로 재연되었다. 이와 함께 각 지역에서는 노동 단체들의 조직적 확대가 진행되어 직업별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부산에서도 1921년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에 관여하였던 김종범·최태희·조동혁 등이 1922년 1월 부산노동동맹회를 결성한데 이어, 1924년 8월에는 정거장·운송점·화차 등의 운송 노동자를 중심으로 부산노우회가 결성되어, 지식인 활동가 중심의 노동 운동에서 노동자 중심의 노동 운동으로의 성격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1924년 12월에는 부산인쇄직공친목회가 조직되어 직업별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전국적 현상에 발맞추어 나갔다.
부산인쇄직공친목회의 구성원인 인쇄 직공은 업무의 특성상 상당한 정도의 문자 해독 능력을 필요로 했으며, 따라서 적어도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갖추어야 했다. 이러한 성격 탓에 1920년대 직업별 노조들이 각 지역에서 결성될 때 인쇄 직공들의 조합은 가장 선진성을 띤 강고한 조직으로 부상하였다. 결성 후 부산인쇄직공친목회는 1925년 6월 21일 회장제를 위원장제로 개편하고, 신임 위원장 김칠성을 위시하여 각 공장 대표자 20여 명을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11월 1일 ‘부산인쇄직공조합’으로 개칭하고, 전국 조직인 조선인쇄직공총동맹의 발기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안팎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부산 지역 인쇄 관련 자본가들의 조직인 부산인쇄동업조합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수호·쟁취하는 전투적 대중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경과]
부산인쇄직공조합은 11월 15일 임시 총회를 열고 부산인쇄동업조합에 대해 직공 대우의 혁신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서 17일에는 9시간 노동제, 최저 임금, 재해 보상, 해고 수당, 조합 활동 보장 등 13개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면서, 21일까지 회답해 주지 않으면 동맹 파업에 나서겠다는 경고문을 보냈다. 그러나 부산인쇄동업조합 측에서는 기한까지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직공들은 22일 새벽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한 달여에 걸친 부산 인쇄 직공 총파업 투쟁이 시작되었다.
총파업 당일인 11월 22일에는 경남인쇄주식회사를 비롯하여 천정, 하래, 상전, 상미당, 수도, 부산일보사, 조선시보사 등 10개 정도의 인쇄 공장의 노동자 200여 명이 동참하였다. 이에 대해 부산인쇄동업조합의 자본가들은 23일까지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통고를 보내고, 평양·대구·일본 등지로부터 파업 깨기꾼을 동원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 결과 파업 대열에 분열이 일어나 복직하는 간부들이 나오기도 했으나, 11월 28일 김칠성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복직한 간부 3명을 제명 처분 하는 등 장기적 항전에 돌입하였다.
이어서 12월 2일 노동자들이 경남인쇄주식회사에 대해 자신의 월급과 부산인쇄동업조합이 관장하고 있는 강제 저축금의 지불을 요구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말았다. 또 12월 5일에는 수도인쇄소에서도 월급 지불을 요구한 노동자를 공장주가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맞서 직공 조합은 월급과 저축금 지불을 거부한 공장주들에 대해 고소를 제기하는 한편, 부산인쇄동업조합의 죄악을 『동아 일보』, 『조선 일보』, 『시대 일보』 등에 폭로하였다.
[결과]
이상과 같이 직공 조합과 동업 조합의 정면 대립으로 시작된 총파업 투쟁은 이후 개별 공장 단위로 분산되어 갔으며, 그 결과 대략 12월 6일 전후까지 소규모 공장 노동자는 복업하였다. 대규모 공장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이듬해 1월까지 지속되었으나, 이는 투쟁의 명분적 측면일 뿐, 해고자 복직과 자본가들의 부분적인 파업 요구조건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대체로 12월 중순경 총파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완전한 승리가 아닌 일종의 타협으로, 파업 기금의 부족과 장기간 파업에 따른 피로감 등도 총파업 종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파업 기간 동안 전국의 인쇄 직공 조합 및 다수의 노동 단체들이 파업 지지를 표방하고 동정금과 격문, 위문 위원을 보내는 등 상당한 지원을 하여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사에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의의와 평가]
1924년의 부산 인쇄 직공 총파업은 초기 사회주의자들, 혹은 민족 자본가들의 지도에 따른 노동 운동이라는 기존의 운동 경향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파업을 주도할 수 있는 독자 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