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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16
한자 龜浦場-三一萬歲運動
영어의미역 March 1st Movement at Gupo-jangte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 만세 운동
관련인물/단체 양봉근|임봉래|윤경|손진태|박영초|김장학|이몽석|양태용|김영길|정치호|권용학|안화중|허희중|박덕홍|김옥겸|윤정은|김옥겸|김윤길|허정|김용이|최종호|유진영|윤대근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해산
발생|시작 장소 구포 시장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1154 일대지도보기

[정의]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3·1 운동의 소식을 접한 구포 지역 유지와 노동자, 농민, 상인을 중심으로, 구포 장날인 3월 29일 구포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서울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梁奉根)이 구포로 내려왔다. 양봉근구포면 서기 임봉래(林鳳來)를 찾아가 서울과 평양의 3·1 운동 소식을 상세하게 전하고 독립 선언서를 제시하면서 구포 3·1 운동이 계획되게 되었다.

[경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내려와 구포면 서기 임봉래와 상의하고 다음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와도 만나 거사를 당부하고 상경하였다.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金玉兼)·김윤길·허정·김용이 등은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 집에서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교대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태용(梁太溶)·김영길·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 등 청년 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 인물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결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의의와 평가]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부동래읍 시위가 학생들이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1920년대 구포 지역 청년 운동 및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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