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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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寅贊 |
영어음역 | Jeong Inch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6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인찬(鄭寅贊)[1887~1932]은 1887년 12월 27일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6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부산의 3·1 운동 당시 24세의 정인찬은 영도 사립옥성학교(私立玉成學校)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의 독립 만세 시위를 지도하였다.
1919년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의 의거를 시작으로 큰 규모의 항일 만세 시위가 동래·부산진·구포 등 부산 각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4월 중순 영도에서는 부산상업학교를 나온 이남식(李南植)이 정인찬의 지도를 받아 사립옥성학교 학생 신기홍(辛基洪)·장용술(張龍術)·허택윤(許澤潤) 등과 더불어 사립옥성학교 뒤편 송림 사이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시내로 행진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정인찬은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상남도 지역 간부 및 간사장의 직책으로 안희제(安熙濟)·윤현태(尹顯泰) 등과 손을 잡고 부산을 무대로 김해·밀양·양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에 몰두하였다. 정인찬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안창호(安昌浩)의 지령에 따라 1919년 7월 독립 의연금 수납증과 군자금의 출자를 촉구하는 문서를 제작한 후 부산 출신의 김소룡(金小龍)·한덕술(韓德述)을 통해 부산·경상남도 지역의 부호에게 우송하여 군자금 출자를 권유하였다. 또한 밀양에서 표면상 위탁 판매업을 목적으로 하는 합자회사 해동상회(海東商會)의 발기인이 되어 주주 모집의 방식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동래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정인찬은 1919년 10월 5일 동래경찰서에 검거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1929년 2월 18일에는 출판법 위반의 죄명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2년 7월 9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