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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95
한자 韓德述
영어음역 Han Deoksu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낙동대로1766번가길 6[구포동 537]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03년 3월 7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0월 5일 -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20년 2월 -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2년 3월 10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10월 - 독립운동 자금 모집
출생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537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537
활동지 부산광역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한덕술(韓德述)[1903~1942]은 1903년 3월 7일에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537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덕술은 7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상남도 지역 간부 및 간사장인 정인찬(鄭寅贊)의 권유에 따라 경상남도 등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 참여하였다. 정인찬은 김소룡(金小龍)에게 조선가정부(朝鮮假政府) 경상남도 간부 및 간사장이라는 인장을 파서 군자금 모집 문서를 제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비 20원을 주고 부산, 김해, 양산의 부호에게 찾아가 군자금 출자를 권유하도록 하였다.

한덕술은 김소룡과 함께 독립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19년 10월 5일 부산 당감동에 사는 윤무봉(尹武鳳) 등의 집을 방문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에 미리 첩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17세였던 한덕술은 1920년 2월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 받았으며,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2년 3월 10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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