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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68
한자 鄭海永
영어음역 Jung Haeyoung
이칭/별칭 해석(海石)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기업인
성별
본관 영일(迎日)
대표경력 국회 의원[7선]
출생 시기/일시 1915년 9월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1년 - 부산제2상업공립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6년 11월 - 병영정미소 중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삼국상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부산상공회의소 상임의원에 임명
1954년 - 제3대 국회 의원[자유당]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대동연탄(주)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대양석탄공업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제5대 국회 의원[무소속]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대동연탄을 대양산업으로 개칭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 의원직 박탈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민정당 창당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대양산업 호남정유 대리점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71년 7월 - 제8대 국회 의원[신민당]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71년 7월 26일 - 국회부의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73년 3월 - 제9대 국회 의원[신민당]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78년 - 제10대 국회 의원[신민당]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80년 - 재산 강제 헌납
몰년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8년 11월 2일 - 고 정해영 묘비 제막식
출생지 경상남도 울산군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1가 36-44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26-15
학교|수학지 부산제2상업공립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구교사]
활동지 병영정미소 -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남외리 489
활동지 대동연탄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25
활동지 대양석탄공업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68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상공회의소 - 부산광역시 중구지도보기
활동지 자유당 울산지구당 - 울산광역시
활동지 신민당 부산진지구당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묘소 울산광역시 북구 연암동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가이자 7선 의원을 지낸 정치인.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해석(海石). 1915년 9월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아들로 정재문이 있다. 정재문은 제12~16대 국회 의원을 역임한 5선 의원이다.

[활동 사항]

정해영(鄭海永)은 1931년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36년 11월 울산의 병영정미소에 중역으로 들어가면서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0년 무렵 정해영은 부산으로 와서 동구 범일동에서 조개탄과 석탄 등을 취급하는 삼국상사를 창업하였다. 이때 정해영은 일본인들이 방 안에서 숯 대용으로 구공탄을 사용하는 데서 힌트를 얻어, 가정에서 취사용으로 쓸 19공탄의 연구 개발에 성공하였다.

정해영은 1949년에 부산상공회의소 상임 의원에 선출되었다[회장 김지태]. 1956년에는 서울에 대동연탄을 차려 마세크 19공탄을 제조하였고, 1958년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마세크탄을 제조하는 대양석탄공업(大洋石炭工業)을 설립하는 한편 동구 범일동에 지점을 냈다. 이렇듯 부산, 대전, 서울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정해영은 마침내 3개 대도시의 연탄업계를 석권하여 전국 석탄 취급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석탄 재벌’이 되었다. 한때 정해영은 부산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업가로 성공하였다.

1961년 대동연탄을 대양산업으로 명칭을 바꾸고, 1968년 호남정유[현 LG칼텍스정유]와 석유 판매 대리점 계약을 맺어, 연탄에서 유류 도소매업으로 사업 전환을 하였다. 이후 서울, 경기 지역으로 영업권을 넓혀 전국 24개의 주유소를 운영한 대양산업은 서울 동마장시외버스터미널, 네슬레 한국총판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여 100대 기업군에 포함되었다.

한편, 정해영은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954년에 울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하지만 비주류의 처지로 자유당 실력자인 이용범(李龍範)과 계속 반목하다가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4·19 혁명으로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울산에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벌어진 5·16 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고 국회 의원직을 박탈당하자 윤보선(尹潽善)을 중심으로 하는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에서 정해영은 민정당 소속으로 대여 강경 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후 1965년 공화당의 한일 협정 강행으로 야당인 민중당의 강경파들이 1966년 신한당을 창당할 때, 정해영은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신한당을 계승하여 정통 야당의 계보를 이어 1967년 신민당이 창당되었을 때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사무장, 신한당 정무위원, 신민당 선거대책 사무차장, 신민당 정책위원장 및 기획위원을 역임하고, 제5대부터 제10대까지 국회 의원을 내리 연임하여 7선 의원의 고지에 올랐다.

제8대 국회에서는 부산진구에 지역구를 둔 지역 정치인이자 신민당 부총재, 국회 부의장, 한영의원협회 회장을 역임한 정치 거목으로 등장하였다. 1973년 8월 정해영은 신민당 부총재로서 미국, 멕시코, 프랑스, 일본 등을 방문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자유가 다소 제한되어도 참아야 한다.”[일명 자유 유보 발언]는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79년 김재규(金載圭)의 손에 박정희(朴正熙)가 살해되는 10·26 사태가 벌어지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도래하자 정해영은 야당의 단결을 통한 정치의 복원을 호소하며 동분서주했지만, 1980년 전두환(全斗煥)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28년간의 정치 활동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신군부는 부정 축재자라는 혐의로 정해영을 감금하였고, 결국 강제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전 재산을 강탈하였다. 이에 농림부가 대양산업의 대주주가 되었다.

정해영은 1991년 국가를 상대로 하는 재산 반환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하였다. 대양산업은 이런 시련을 거치면서 사세가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IMF 외환 위기라는 ‘한파’까지 겹쳐, 현재는 직원 70여 명[비정규직 포함]에 5개 주유소[2003년 매출액 607억 원] 규모로 줄어들었다. 2005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생전에 회고록인 『정해영 회고록-신념과 의지로 민주화의 기둥 되다』[도서출판 오름, 2001]를 남겼다.

[묘소]

묘소는 울산광역시 북구 연암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고 정해영 묘비 제막식이 2008년 11월 2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연암동의 정해영 묘소에서 거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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