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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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德周 |
영어음역 | Jo Deokju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수영야류[수영들놀음]의 가면 제작 기예능 보유자
[가계]
조덕주는 1914년 2월 3일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서, 수영야류의 복원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말뚝이 춤의 명인 조두영(趙斗榮)[1892~196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조덕칠(趙德七)[1932~1995]은 말뚝이 역을 맡아 기예능 보유자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수영야류의 기예능 보유자인 조재준(趙在俊)[1906~1974. 말뚝이역]과 조복준(趙福俊)[1920~1966. 악사] 형제는 조덕주의 일가 종형제(從兄弟)이고, 역시 수영야류의 영감 역 기예능 보유자인 조홍복(趙弘福)[1933~2023]과는 재종형제(再從兄弟) 간이다. 이들은 대대로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수영성 북문 일대에 거주하면서, 수영성 동문 일대의 태씨(太氏) 일가와 함께 수영야류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조덕주는 부친인 조두영이 수영야류 말뚝이춤의 명인으로 수영야류의 복원을 주도하는 등의 집안 내력으로 인하여, 어린 시절부터 수영야류와 인연을 맺었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의 민속 가면극으로, 수영야류는 동래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었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밀어닥친 외래 사조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1935년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전승이 단절된 수영야류의 재현과 복원은 8·15 이후에 가능하게 되었다. 수영야류의 재현과 복원을 주도한 것이 조덕주의 아버지인 조두영을 비롯하여 최한복(崔漢福)[1885~1968], 태명준(太命俊)[1906~1979] 등 수영야류의 명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조덕주가 몰두한 것은 수영야류에 사용되는 가면[탈]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수영야류에서는 집집마다 지신밟기를 한 후 부정을 타지 않은 일정한 장소에서 탈과 도구를 만든다. 그리고 탈이 만들어지면 가면제(假面祭)[탈제]를 지낸다. 이때 제나 연희 의식의 절차를 보면, 가면 소각 절차, 가면 신성시 사상, 부락 수호신에 대한 고사 등과 같이 원시사회의 습속과 유사한 점이 많다. 수영야류는 다른 지방의 탈놀이에 비해 가면의 종류가 적은 편인데, 사용되는 가면[탈]은 ①수양반 ②차양반 ③셋째양반 ④넷째양반 ⑤종가도령 ⑥말뚝이[막둑이 또는 막득이라고 한다] ⑦영노 ⑧영감 ⑨할미 ⑩제대각시 ⑪범 ⑫사자와 같은 것이었다. 이 밖에 의원, 봉사, 향도꾼은 탈 없이 등장한다.
1963년 4개의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야류의 전 과장의 대사, 탈, 연기 등이 복원된 뒤 1972년 수영야류가 국가 무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을 때 그간 수영야류를 보존해온 이들도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일생 동안 수영야류의 각종 가면[탈]을 제작해온 조덕주도 이때 기예능 보유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수영야류의 여타 기예능 보유자와 달리, 연희자가 아닌 유일한 기예능 보유자였던 것이다.
1983년 10월 28일 조덕주는 향연 68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2년 2월 26일 수영야류의 가면 제작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