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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63
한자 朴健資
영어음역 Bak Geon Ja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선우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관료|기업가
성별
대표경력 구포읍장 역임
출생 시기/일시 1914년 8월 20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낙동주조주식회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구포체육회 회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구포양조공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0년 9월 - 구포읍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1년 1월 - 구포읍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구포라이온스클럽 초대 회장에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학교|수학지 보성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1
활동지 낙동강주조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정의]

부산 출신의 기업가이자 관료.

[활동 사항]

박건자(朴健資)는 1914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서 태어나,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낙동강주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낙동강 소주’, ‘낙동강 청주’ 등을 생산하였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신망이 높아 1947년 구포체육회 회장을 맡으면서 8·15 해방을 기념하고 지역 주민의 화합을 기하기 위해 구포 지구 친선 축구 대회를 창설하였다. 이 대회에는 구포읍구포리, 덕천리, 만덕리, 화명리, 금곡리, 금성리 등의 대표 팀이 참가하였다.

남녀노소 지역민과 방학 동안 놀러온 유학생 등 5,000여 명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던 이 축구 대회는, 이후 구포의 향토 축제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6·25 전쟁 기간인 1950~1951년 2년간 열리지 못해 중단 위기에 놓였다가, 1953년 피난민이 부산에 모여든 것을 계기로 전국 축구 대회로 확대·개최하여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주민들을 위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과 지역 주민들의 신망을 바탕으로 박건자는 관료·정치가로 변신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약 1년간 구포읍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4·19 혁명 이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였으나, 후에 주위의 권유로 다시 구포읍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읍장 직에서 물러났다. 1968년에는 구포라이온스클럽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박건자는 낙동강주조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낙동강에 대한 향토애를 일으키기 위해 부산의 일간 신문에 「낙동강」 가사를 모집하였다. 당시 부산의 문인 김정한·정진업(鄭鎭業)·이주홍·장하보, 언론인 손풍산 등에게 의뢰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뽑았다.

「낙동강」

서라벌 옛 터전을 적시어 주던/ 가람은 세월 따라 끝없이 흘러/ 갈대에 나부끼는 두덩을 메고/ 장기에 날을 세워 옥토를 갈던/ 겨레의 자손들이 여기에 산다./ 흘러라. 아- 구비쳐라./ 바다로 가자!/ 어머니의 젖가슴인/ 낙동의 강아- 낙동강의 강아!

이 글에 음악가 이상근(李相根)이 작곡을 하여 「낙동강」이라는 노래가 완성되자, 박건자는 이 작품의 악보와 가사를 인쇄하여 소주와 청주의 술병에 붙여 판매하였다. 이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낙동강 소주와 청주는 6·25 전쟁으로 부산에 내려온 피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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