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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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永鎬 |
영어음역 | Heo Yeongho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나철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허영호(許永鎬)[1900~?]는 1900년 12월에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났다.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범어사(梵魚寺) 산하 명정학교에 입학하였다. 범어사 3·1 운동은 서울의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4일 부산으로 돌아온 김법린(金法麟)과 김상헌(金祥憲) 등이 독립 선언서를 전하면서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범어사 지방학림에 재학 중이던 허영호는 ‘한 번 죽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만 못하다’라는 격문을 제작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러나 17일 밤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에서 시위 주모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였다. 겁을 먹은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이 밀고하여, 일본 경찰과 헌병이 출동하였기 때문이다.
허영호는 검거를 피한 이들과 함께 19일 동래 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부산감옥소에서 복역하였다. 허영호는 출옥 후 일본에 유학한 뒤에 범어사 학원 강사,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교수와 이사장을 거쳤으며 동국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지만,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다.
[저술 및 작품]
『원인론(原人論)』, 『대승기신론』[불교사(신판) 10집, 1938],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미타경』[불교사(신판) 7집, 1937], 『불교 성전』, 『십이문론』, 『십이상연법에 대해서』, 『원효 불교의 재음미』, 『조선 불교 교육 제도의 결함과 개선』, 『조선 불교와 교지 확립』, 『결전 2년과 새로운 불교에의 구상』[불교사(신판) 47호, 1943] 등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