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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40
한자 金聖佑
영어음역 Gim Seungwo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513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항상무회의소 회장
출생 시기/일시 1864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0년 - 정치국과 함께 회흥사(會興社) 설립 인가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초량여자보통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부산항 상무회의소 회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7년 5~7월 - 국채 보상 운동 전개
몰년 시기/일시 1918년 12월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513

[정의]

개항기 부산 출신의 객주.

[가계]

김성우(金聖佑)[1864~1918]는 최남순(崔南順)과 결혼하여 김두운, 김무연, 김새연, 김두휘, 김순영 등 2남 3녀를 두었다. 동생 김덕우도 함께 객주업을 하였다.

[활동 사항]

김성우는 개항기 객주업을 하였다. 당시 청룡환과 황룡환을 비롯한 40~50척의 선박을 소유하고 해운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이 배를 이용하여 함경도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부산으로 가져와 팔거나 일본과 무역하였다. 1900년 김성우는 정부로부터 정치국(丁致國)과 함께 함경도 지방의 해산물을 저장할 회흥사(會興社)라는 창고 설립을 인가받았다. 이 창고가 초량에서 유명했던 명태고방[북선창고로 불리다가 나중에 남선창고로 불림]이다.

1907년 무렵 김성우는 부산 지역에서 조선인 자본가로 자리를 잡으면서, 부산항 상무회의소 회장을 맡았다. 부산항에서 객주업은 항상 일본인 상인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1910년의 식민지화 이후 이러한 흐름이 더욱 강해지자, 김성우를 비롯한 이규직(李圭直)과 오홍규, 이영균 등 부산의 대표적 객주 6명은 일본인 상인들의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 자본을 모아 공동 객주 영업을 시도하였다. 김성우는 1911년 당시 자본금 1만 2000환으로, 부산 지역 조선인 가운데 열 번째 자산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편, 김성우는 애국 계몽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의 막내 딸 김순영의 회고에 따르면, 1905년 김성우는 초량여자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아내인 최남순에게 학교 운영을 맡겼다고 한다. 그리고 1907년 전국적으로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자 일본인 상인들과 직접 경쟁하던 부산 지역 조선인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는데, 김성우가 회장으로 있던 부산항 상무회의소는 국채 보상을 추진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모금 운동을 벌였다.

또한 1907년에는 일본에 유학한 조선인 학생 21명이 유학비 문제로 ‘단지 혈맹’을 하였다. 이에 고종과 한국 정부도 참여하는 등 전국적으로 이들 학생들의 유학 경비를 모금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5월 부산 지역에서도 동래 부윤을 비롯한 관료와 김성우 등 부산의 유지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모금의 실무는 부산항 상무회의소에서 담당하였다. 1908년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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