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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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章守 |
영어음역 | Yun Jangsu |
이칭/별칭 | 윤장수(尹張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윤장수(尹章守)[1895~1958]는 1895년 1월 6일에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윤장수(尹張守)이며 필묵상(筆墨商)이었다. 윤장수는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구포는 낙동강 좌안에 위치하여 부산, 김해, 양산, 동래에 접한 요충 지대로서 예로부터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과 동래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던 3월 중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와 구포면사무소 서기인 임봉래(林鳳來)와 사립화명학교 교사인 윤경(尹涇) 등을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구포 지역 청년들은 구포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정하고, 3월 27일과 28일에는 거사에 필요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새도록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이들은 구포 시장에서 장꾼 1,000여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윤장수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시위 도중 11명의 주동자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을 비롯하여 윤장수 등 젊은 청년들은 붙잡힌 주동자들을 구하려고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1,2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면서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구포주재소로 돌진한 청년들은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 집기를 부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체포되었다. 이때 윤장수도 체포되어 1919년 7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1958년 3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