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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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涇 |
영어음역 | Yun G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윤경(尹涇)[1889~1977]은 1889년에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임천재(臨川齋)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으며 1908년에 세워진 사립화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0년 사립화명학교 교사로 근무 중 경상남도 사립 학교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1918년에 사립화명학교가 구포공립보통학교에 통합될 때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서울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중순에 사립화명학교의 옛 동료이자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한 양봉근(梁奉根)이 구포면사무소 서기 임봉래(林鳳來)와 함께 윤경을 찾아와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구포 지역의 의거를 당부하였다. 이에 윤경, 임봉래 등은 3월 27일과 28일 박영초(朴永初)와 이수련의 집에서 동지들을 모아 논의한 결과,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이들은 3월 29일 정오에 박덕홍(朴德弘), 손진태(孫晋泰), 양태용(梁太溶), 권용학(權龍鶴), 안화중(安華重), 허희중(許希中) 등 청년들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함께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 도중 김옥겸(金玉兼) 외 11명의 주동자들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나머지 시위대들은 구금된 주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인 발포를 자행함으로써, 많은 시위 군중이 체포되었다. 이때 윤경도 체포되어 7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이후 윤경은 1924년 대천청년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주야 학교를 설립해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농촌 문고를 만들어 책 읽기를 권장하면서 저축 운동도 벌여 나가는 등 지역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윤경은 1977년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윤경이 사립화명학교에 근무할 때 작성한 『사립화명학교 교무 일지』가 남아 있다. 또한 윤경은 8·15 광복 이후 낙동강 하류 지역의 한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낙남시계(洛南詩契)에 참여하여 많은 한시(漢詩)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