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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347
한자 東萊民亂
영어의미역 People’s uprising in Dongna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연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란
관련인물/단체 정희백|전진모|김군보|김시돌
발생|시작 시기/일시 1883년 5월 11일연표보기 - 동래 관아 습격
종결 시기/일시 1883년 6월 24일연표보기 - 종결
발생|시작 장소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1883년 동래부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란.

[역사적 배경]

관변 자료의 단편적 서술로 인해 구체적인 민란의 발생 원인이나 성격을 알기는 어렵다. 단지 경상 감사와 안핵사(按覈使)의 장계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억지로 일로 만들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는데, 민란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동래 민란을 1882년 임오군란과 연관 짓기도 한다. 1884년 당시 한필이라는 사람이 화적의 실태를 언급하면서, 화적이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여 도로가 막히고 상인이 다니지 못하는데 특히 영남이 심하다고 하였다. 특히 한필은 이들이 대부분 임오년[1882] 가을의 역졸의 무리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동래 민란의 주도 세력을 당시 동래에서 창궐하던 화적, 즉, 임오군란의 동조 세력으로 파악한 것이다.

[경과]

1883년(고종 20) 5월 11일 동래부의 난민 수백 명이 동래 관아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관정(官庭)에 들어가서 당(堂)에 올라 시위를 하고, 옥문을 부숴 죄수를 풀어주었다. 민란의 주동자는 정희백, 전진모, 김군보, 김시돌이었다. 가담자의 수가 수백 명이었다는 것과 사태의 수습 과정에서 주동자를 포함하여 총 32명이 처벌받은 것을 볼 때, 민란의 규모는 상당한 것이었다. 또 민란의 진행 과정에서도 조직적인 사전 준비로 부민(府民) 주도의 민회를 개최하고, 정소 운동(呈訴運動)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

민란이 발생하자 경상 감사 조강하는 민란 발생의 책임을 물어 동래 부사 김선근(金善根)을 즉시 파면하고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감사의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안동 부사 조병호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민란의 주모자는 처형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또 동래 부사로 조병필(趙秉弼)을 임명하였다. 안핵사 조병호는 6월 24일 주동자 4명을 효수하였고, 주모자 28명을 처벌하였다.

[의의와 평가]

1862년 농민 항쟁 이후 고종(高宗) 대의 농민 항쟁은 크고 작은 사건으로 곳곳에서 지속되다가 1883년부터 본격적으로 재연되어 1894년 최대의 농민 전쟁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1883년의 동래 민란은 고종 대 농민 항쟁 재연의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1876년 개항 이후 최초로 개항장에서 일어난 민란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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