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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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金-憲-永 |
영어음역 | Yi Heonyeong |
이칭/별칭 | 경도(景度),경와(敬窩),동련(東蓮),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개항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관료.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도(景度), 호는 경와(敬窩)·동련(東蓮). 선조의 생부인 덕흥 부원군 후손의 선파(璿派)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명희(李命喜)이고, 할아버지는 이서헌(李書憲)이며, 아버지는 이정태(李鼎台)이다. 어머니는 조재희(趙在禧)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헌영(李(金+憲)永)은 1837년(헌종 3) 한양에서 태어났다. 1870년(고종 7)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특제되었다. 1881년(고종 18) 박정양(朴定陽) 등 12명의 관료가 중심이 된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2명에는 내무성과 세관 등 관청, 육군이나 기선(汽船) 등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헌영은 민종묵(閔種默), 조병직(趙秉稷)과 함께 세관을 담당하였다. 이때 민건호(閔建鎬)가 이헌영을 수행하였다.
1883년(고종 20) 8월 부산에 감리가 파견되었을 때 부산감리서 초대 감리로 임명되었다. 민건호는 서기로 임명되었다. 1881년 조사 시찰단의 이헌영과 민건호의 관계가 부산감리서에서는 감리와 서기[관]의 관계로 바뀌었다. 개항장 감리서는 개항장에서의 외국인의 상업 및 기타 활동을 관리하고 개항장의 해관[세관]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설립된 지방 관청이다.
이헌영은 1883년 12월 11일 부산감리서에 도착하여 12일부터 근무하였다. 1884년 1월 2일 감리통상사무공서(監理通商事務公署)라는 현판을 달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헌영이 가장 먼저 처리한 해관 문제는 일본인에게 대여한 부산 해관의 창고 일부를 다시 돌려받는 일이었다. 그가 처리한 해관 사무 내용을 보면 대부분 업무상 편의를 위한 조치였다. 감리는 정기적으로 1개월, 또는 수개월분 관세 내역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현 외교부]에 보고하였다.
이헌영은 감리로서 객주 등 상인을 대상으로 지방관의 고시와 같은 성격의 글을 해관에 내걸었다. 그리고 여러 국적의 외국인이 모여 있는 개항장 부산에서 외교 사절을 접대하는 등 외교 대표자이면서 조계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처리하는 행정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07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헌영은 내외 관직을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자신의 주요 문서나 기록을 정리한 『영관 집략(瀛館集略)』[홍문관 수찬 일기], 『부풍 집략(扶風集略)』[부안 현감 일기] 등 각종 집략을 남겼다. 그 외에 『기수 집략』[경기 암행어사 일기], 『신안 집략』[정주 목사 일기], 『일사 집략』[조사 시찰단 일기], 『교수 집략』[경상도 암행어사 일기], 『용만 집략』[의주 부윤 일기], 『영부 집략』[영흥 부사 일기], 『교번 집략』[경상도 관찰사 일기], 『금번 집략』[충청도 관찰사 일기], 『재교 집략』[경상북도 관찰사 일기] 등이 있다.
또 일본에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을 때 『조약 유찬』, 『부산 원산 반년 수출입표(釜山元山半年輸出入表)』, 『세관 사례』 등 수집한 세관 사무 관련 문건을 한문으로 옮기고 내용을 교정하였다. 이 자료는 귀국 후 『각항 무역 직제』, 『세관 사무』, 『무역 장정』 등 보고서로 작성되었고, 1881년 이후 조선 정부의 세관 창설에 활용되었다. 그리고 초대 부산항 감리로 활동하면서 쓴 일기인 『부서 집략(釜署集略)』을 남겼다. 이 책은 감리로서의 활동은 물론 부산 개항장 연구를 위한 일급 사료이다. 그리고 『경와 만록(敬窩漫錄)』[문집]과 『향리 약속』[경상 감사 때 간행한 향약]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10년 6월 문정(文貞)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