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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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鳳今 |
영어음역 | Byeon Bonggeu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부산 첨사 밑에서 무장을 지낸 변광(卞光)이다.
[활동 사항]
변봉금(卞鳳今)[1880~1958]은 1880년 1월 11일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변봉금은 19세 때 최상훈(崔尙勳)과 결혼하였으며 통역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만주로 갔다. 한일 병합 후 남편인 최상훈이 만주 독립군에 참여하면서 소식이 끊어져 홀로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정착하였다.
변봉금은 만주에서 가지고 온 돈으로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 집을 사 자리를 잡고 하숙업을 시작하였다. 이 하숙집에 강홍렬(姜弘烈)[3·1 운동 당시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 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남지부장], 김법린(金法麟), 김효석(金孝錫)[상해 임시 정부 요원, 전 내무부 장관] 등 독립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봉금은 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고 투옥된 하숙생과 독립지사들의 옥바라지와 동지들 간의 연락까지 도맡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점차 빚이 늘어나 하숙집을 처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외동딸 최수련(崔守連)마저 18세로 요절하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박희창(朴喜昌)을 비롯한 독립운동 동지들이 성금을 거둬 당시 변두리인 수영에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가 되어 많은 운동가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최천택(崔天澤), 김범부(金凡夫), 이기주(李基周) 등 부산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이 그 집을 사랑방으로 삼고 자주 모임을 가졌다. 이처럼 변봉금은 한평생 독립운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돌보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58년 1월 2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