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15 |
---|---|
한자 | 金鶴鎭 |
영어음역 | Gim Hakjin |
이칭/별칭 | 성천(聖天),후몽(後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천(聖天), 호는 후몽(後夢). 병자호란 때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11세손으로, 아버지는 김병교(金炳喬)이다.
[활동 사항]
김학진(金鶴鎭)[1838~?]은 1871년(고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벼슬을 받았다. 1874년(고종 11)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1882년(고종 19) 정3품으로 승진하여 승정원 동부승지, 호조 참의, 1884년(고종 21) 외무아문 참의를 지냈다. 1885년(고종 22) 동래 부사 겸 부산항 감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부산항 일본인 거류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싸움이 붙어 조선인이 죽은 ‘선창가 투쟁 사건’이 일어나자 김학진은 일본 영사에게 엄중히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하였다.
1887년(고종 24) 이조 참의, 한성부 소윤,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1892년(고종 29) 외무아문 협판, 1893년(고종 30) 이조 참판, 1894년(고종 31) 승정원 도승지, 형조 판서와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전라도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김문현(金文鉉)의 뒤를 이어 전라 감사로 내려갔다. 1894년 4월 27일~5월 8일 관군과 동학군이 전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김학진은 동학 농민군 대표인 전봉준(全琫準)과 전주 회담을 갖고 동학군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기도 하였다. 그해 9월 동학군이 다시 싸울 채비를 갖추자 김학진은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파직을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이후 중앙으로 옮겨 병조 판서직에 올랐다.
1897년(고종 34) 중추원 1등 의관 칙임관, 1899년(고종 36) 홍문관 학사, 궁내부 특진관, 1900년(고종 37) 시종원 경(侍從院卿), 홍문관 학사, 경효전 제조, 1901년(고종 38) 태의원 경(太醫院卿), 1906년(고종 43) 홍문관 태학사 등을 거쳤다. 1907년(순종 1) 70세가 되어 기사(耆社)[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갔으며, 곧 이어 종1품으로 승진, 규장각 대제학에 올랐다.
[상훈과 추모]
1909년(순종 3) 훈(勳) 2등에 서훈되고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1910년 조선이 강제 합병된 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에 의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