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99 |
---|---|
한자 | 鄭寅學 |
영어음역 | Jeong Inhak |
이칭/별칭 | 경국(景國),유당(留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국(景國), 호는 유당(留堂). 아버지는 정희조(鄭喜朝)이다.
[활동 사항]
정인학(鄭寅學)[1839~1919]은 1870년(고종 7) 생원시에 급제하고 1880년(고종 17) 문묘 작헌례 문과(文廟酌獻禮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고종 18) 홍문관 부교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2년(고종 19) 홍문관 부응교로서 임오군란의 피해를 지적하고, 주모자의 처벌을 요구한 옥당의 연차(聯箚)에 참여하였다.
1887년(고종 24) 병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888년(고종 25)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90년(고종 27) 사간원 대사간, 이듬해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1892년(고종 29)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1894년(고종 31) 이조 참판을 거쳐 동래 부사로 나갔다. 1897년(고종 34) 봉산 군수, 1901년(고종 38)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되어 칙임관 4등에 서임되었다. 1905년 봉상사 제조를 지냈고, 1907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칙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1910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정인학이 부사를 지낸 동래는 한반도 동남단 끝에 자리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동래읍성은 부산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초량 왜관을 무대로 일본과의 외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래의 행정과 사법, 외교, 국방 업무의 책임자였던 동래 부사에는 1546년(명종 1) 이윤암이 초대 부사로 임명된 이후 1895년(고종 32) 정인학이 사임하기까지 349년 동안 255명이 거쳐 갔다.
[묘소]
정인학의 묘는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