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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62
한자 李明厚
영어음역 Yi Meonghu
이칭/별칭 명복(明復),성암(誠庵),이우용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영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리학자
성별
본관 경주
출생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김해 태야면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거주|이주지 김해 태야면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정의]

개항기 부산 출신의 성리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복(明復), 호는 성암(誠庵). 아버지는 이시회(李時檜)로, 김해 태야면의 이름난 효자였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다.

[활동 사항]

이명후(李明厚)[1856~1896]는 1856년 김해 태야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서 태어났다. 이명후가 출생하던 날 밤 폭우가 내리고 우레가 쳤는데, 할아버지가 큰 용을 낚는 꿈을 꾸어 초명을 ‘이우용’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재주가 뛰어나 5세 때 글을 거뜬히 읽었고, 하루에 사서(四書) 수십 줄을 읽고 썼는데 한 글자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9세 때, 김해 부사로 부임한 근기 실학(近畿實學)의 계승자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을 찾아가 수학하였고, 21세 때부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을 사사하여 이학(理學)에 잠심하였다. 지역에서 이름난 효자였던 아버지 이시회를 닮아 이명후도 효우(孝友)가 지극히 돈독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명후는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선구자인 이진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허남려(許南黎), 곽종석(郭鍾錫), 윤주하(尹胄夏), 이대계(李大溪), 이승희(李昇喜) 등과 교분을 나누면서 일생 동안 성리학의 궁구에 매진한 김해 지역의 거유(巨儒)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직접 베껴 날마다 강구하고 연역하면서 평생을 성리학 연구에 진력하였다. 『유금강 일록(遊金剛日錄)』을 포함한 유고(遺稿)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맥을 잇는 성주 지역의 거유 이종기(李種杞)[1837~1902]가 이명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輓詩)를 지었다. 만시는 이종기의 문집인 『만구집(晩求集)』 권2에 「도이명복(悼李明復)」이라는 제목으로 3수가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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