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진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560
한자 李震相
영어음역 Yi Jinsang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32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계몽 운동가|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구포은행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6년 8월 - 대한자강회 동래지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구포저축회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정정의숙 설립 찬조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동래은행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1~1924년 - 동래은행 감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동래면 협의회 회원으로 활동
활동지 대한자강회 동래지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정정의숙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구포은행[경남은행] - 부산광역시 북구
활동지 동래은행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동래면 협의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계몽운동가이자 경제인.

[개설]

이진상(李震相)의 출생지와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래와 구포 일대 경제, 사회 방면에서 존재가 뚜렷하여, 부산을 근거지로 활동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진상은 개항기에는 계몽 운동에 전념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경제 활동에 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이진상은 개항기에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가 설립되자 부산 지역 인사들도 많이 가담하였는데, 1906년 8월 동래에서 입회 청원인 60명이 참석하여 임시회가 개최될 때 이진상대한자강회 동래지회에 가입하였다. 1907년 이진상은 동래에 사립 학교인 정정의숙(貞靜義塾)이 설립될 때 찬조자로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이진상은 민족계 보통 은행인 구포은행[경남은행]과 동래은행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모두 28개의 보통 은행이 있었는데, 구포의 지주와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909년 만든 구포저축주식회사는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민족계 보통 은행이다. 1915년 상호를 (주)경남은행으로 변경하고 본점을 부산에, 지점을 구포로 바꾸는 등 경영 형태와 명칭을 변경하면서 1928년까지 약 20년간 존속하였다.

1918년 동래 복천동에 설립되어 1933년까지 존속한 동래은행 역시 동래와 기장 지역 대지주와 상인을 비롯한 지역 명망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족계 보통 은행이다. 동래은행은 원래 일종의 저축계(貯蓄契)인 봉래일기계(蓬萊一紀契)를 모체로 하여, 1918년 8월에 자본금 50만 원의 주식회사로 성립하였다. 봉래일기계를 설립한 사람들은 동래 읍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명망가들이었다. 이진상은 봉래일기계 발기인 30명 중 한 명이었으며, 봉래일기계의 감사이기도 하였다. 이진상동래은행 주식 200주를 보유하고 있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는 동래은행 감사역을 맡았다. 1923년 이진상은 동래면협의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동래은행의 설립과 경영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는 동래 지역의 각종 교육 운동이나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다. 신식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식산흥업을 통해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며, 이를 토대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문명 개화론이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이진상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