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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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監董所許貸錢區劃節目 |
영어의미역 | Gamdong Soheo Daejeon Guhoek Jeolm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성덕 |
[정의]
1775년 부산 왜관의 수리비 부족액을 마련하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가 기록한 책.
[개설]
조선 후기 부산 왜관은 조선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일본의 시설로, 외교 사절이 머무는 건물을 비롯해 400~500명의 왜인들이 거주하는 각종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1678년 부산 왜관[초량 왜관]의 완공 이후 왜관 건축물의 수리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왜관 내에 일본인 목수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왜관에서는 동관의 삼대청과 서관의 삼대청 전체를 수리하는 대감동(大監董)이 25년마다 실시되었고, 중간에 화재 등으로 소실된 건물을 다시 짓는 소감동(小監董)이 시행되었다. 대감동과 소감동의 공사 비용은 조선에서 부담하였으며, 조선 정부의 동의를 얻어 대마도의 왜관 수리 담당자와 기술자 등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조선 정부는 그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는 것이 상례였다.
[편찬/간행 경위]
1774년 4월 부산 왜관의 동관, 서관 삼대청 수리 공사가 시작되어 1775년 4월에 끝남으로써 1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사가 완료된 뒤 공사 비용을 정산할 방법이 없어 비변사로부터 공사 비용을 처리할 방도를 구하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가 『감동 소허 대전 구획 절목(監董所許貸錢區劃節目)』을 통해 상황을 정리하였다.
[형태/서지]
1책[5장]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34.5×29.4㎝이다. 겸사(兼使)의 수결이 있다.
[구성/내용]
1774년 왜관 수리는 대감동으로 실시되었는데, 대상은 동관 삼대청[왜관의 최고 책임자 숙소인 관수 왜가, 외교 업무를 담당한 재판 왜의 숙소, 무역 장소인 개시 대청]과 서관의 삼대청[제1세견 송사의 숙도인 동대청, 참판사가 머무는 중대청, 부특송사의 숙소인 서대청]과 행랑 등이었다. 부산 왜관의 공사 중 최대 규모로 비용은 5만 3,700냥이 소요되었다. 공사는 1774년 4월에 관수 왜가 93칸, 재판가 51칸, 개시 대청 60칸 등 동관 204칸의 수리를 시작하여 1775년 4월 26일에 마쳤다. 소요 비용은 1만 7,120냥이었다. 아울러 1,774년 1월 4일에 서관 삼대청과 행랑 총 941칸의 공사를 시작하여 1775년 9월 27일에 끝냈으며, 총 공사비는 3만 6,580냥이었다.
『감동 소허 대전 구획 절목』은 공사비와 관련해 경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비변사에서 지시한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감동 역관의 보고를 토대로 동래 부사가 보고한 내용과 그에 대한 비변사의 지시를 담고 있다. 마지막에는 겸사 도사(都事)의 수결이 있으며 비용 마련을 위한 방안이 정리되어 있다.
『감동 소허 대전 구획 절목』에 의하면 총 공사비는 5만 1,758냥으로 경상 감영에서 3,000여 냥을 줄여 4만 8,750냥으로 계상하였으나, 조정에서 다시 1만 5,000여 냥을 줄여 총 3만 8,700냥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들 경비 중 1만 5,000냥을 빌려 마련하였다. 경비 마련은 동래부의 접대 비용인 지대전(支待錢)과 진주, 사천, 남해, 하동, 곤양, 고성, 진해, 웅천, 칠원, 김해의 조세(漕稅)로 충당하였다. 부족액은 7년간의 공목(公木) 비용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 왜관 건물의 수리비 마련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책을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조선 후기 왜관 운영과 관련된 경제적 부담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