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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26
한자 東萊獨鎭
영어음역 Dongnae Dokjin
영어의미역 Dongnae Military Camp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복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에 있던 독립 진영(鎭營).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후기 지방군은 진관 체제(鎭管體制)에 바탕을 두었다. 조선 전기에 동래부의 군사권은 경상 좌병영 휘하의 경주 거진(巨鎭)의 첨절제사인 경주 부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동래부의 군사적인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효종(孝宗) 때 독립 진으로 승격되었다.

[관련 기록]

『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6년 1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도는 왜국의 관방(關防)인 요충지이고 동래는 그와 서로 마주하여 산천초목을 똑똑히 볼 수 있으므로 방비하는 방책을 허술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래부의 속오(束伍)는 겨우 400명을 채울 뿐이고 사변이 있으면 경주 진관(慶州鎭管)에서 징발하여 가도록 당초에 제도를 세운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또, 해진(海鎭)의 변장(邊將)은 녹봉을 받을 길이 없으므로 군사를 줄여 베를 거두어서 자급하는데, 이것은 변장의 죄가 아닙니다.

해변에 사는 자를 토병(土兵)에 원정(元定)하고 베를 거두어 주면 편리할 듯합니다. 또, 봉수(烽燧)·후망(候望)의 일은 전에 이미 계문하였거니와, 동래는 만해(蠻海) 가에 있는 땅 끝이어서 왜선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 길이 없으므로 본부와 수영(水營)에 각각 후망하는 곳을 두고 또 항해하면서 변방의 사변에 대비하는 것이 고사(故事)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폐지하여 행하지 않으므로 왜선이 갑자기 오면 부사(府使)가 미처 치계(馳啓)하지 못하고 수사(水使)가 미처 옷을 입기도 전에 변이 닥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봉수 연대(烽燧烟臺)에 따로 후망하는 군사를 두고 배 한 척을 보면 포 한 방을 쏘게 하여 열 방이 넘으면 적선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경(邊警)을 알리는 규례이니, 이것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동래와 양산(梁山) 사이에 험조(險阻)한 곳이 있으니, 산성(山城)을 쌓고 군향(軍餉)을 저축해야 하겠으며 부사가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숙종 18년 5월 23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요전 인대하였을 때 동래 방어사(東萊防禦使)는 우선 설치하지 않는다는 뜻을 품달하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의 거행 조건에 재가가 내리면 마땅히 본 도에 분부할 것입니다.”

『비변사등록』 숙종 18년 5월 24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래 부사 김홍복(金洪福)이 새로 겸임할 방어사의 절목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보고하였는데 그 사이에는 서로 방해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경주진(慶州鎭)에 소속된 양산과 기장(機張)의 군병을 동래에 떼어 주고, 또 안동진(安東鎭)의 군병을 대신 경주에 주도록 하였는데 이는 곤란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래 고을은 왜인들을 접대할 뿐이므로 급할 때 임기응변하도록 요구하기는 어려우니 방어사를 겸임시키는 것은 무익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감히 여쭙니다.”

[내용]

1655년(효종 6) 종전까지 경상 좌병영 관할 하의 경주 진관에 속해 있던 여러 진 가운데 하나인 동래진을 경주 진관에서 떼어 내 독진으로 승격시켰으며, 동래 독진(東萊獨鎭)이 인근의 양산군과 기장현 소속의 군사까지도 통합하여 지휘하게 하였다. 1690년(숙종 16)에는 동래 부사 이형상(李衡祥)의 장청(狀請)으로 동래에 종2품의 방어사를 두어 부사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다. 1692년(숙종 18)에 이를 폐지하였다. 1739년(영조 15)에는 부사 구택규(具宅奎)의 건의에 따라 부사가 동래 수성장(東萊守城將)을 겸임하여 독진의 군사를 지휘하고 군사 사무를 처리하였다. 1749년(영조 25)에는 독진 겸 수성장이 되어 조련·호궤(犒饋)·상격(賞格)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대동미의 운영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동래 독진은 양산과 기장의 군사를 관할하면서 군사를 운영하였다. 동래 독진의 군사 조직은 수성장, 중급 군관, 일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무임들의 업무 공간인 무청(武廳)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병종(兵種) 가운데는 별기위와 별무사가 특징적이다. 이런 제도는 진관이 해체되는 1895년(고종 32)까지 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래 독진을 통해 조선 후기 동래부의 군사적 중요성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지방 군제의 체제와 운용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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