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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97
한자 扶桑錄
영어음역 Busangrok
영어의미역 1617 Travelogue of Japa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저자 이경직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28자
규격 21.5×15.7㎝
저술 시기/일시 1617년연표보기 - 저술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로 664

[정의]

1617년 부산에서 일본으로 간 통신사 이경직(李景稷)의 사행록.

[개설]

1617년(광해군 9) 회답사 겸 쇄환사(回答使兼刷還使)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교토[京都]까지 다녀온 이경직의 사행록이다. 사행의 목적은 오사카[大阪] 전투의 승리를 통한 일본 국내의 평정 축하 겸 조선인 포로의 쇄환이었다. 일기는 1617년 7월 4일 부산에 머물고 있을 때 시작하여 10월 18일 쓰시마의 와니우라[鰐浦]를 떠난 날로 끝난다.

[저자]

이경직[1577~1640]의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이다. 조선 정종의 8세손이며, 이항복(李恒福)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05년(선조 40)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홍문관 등의 부서를 거쳐, 1613년 병조 정랑이 되었다. 영창 대군을 빌미로 하여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했던 계축옥사 때 축출되었다. 1617년(광해군 9) 회답 겸 쇄환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의 사신과 교섭하여 화의를 성립시키는 데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의주 부윤을 거쳐 호조 판서, 강화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편찬/간행 경위]

1607년 조선은 처음으로 회답 겸 쇄환사를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 파견해 일본과의 외교를 재개하였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북쪽의 후금 세력이 팽창하자 일본과의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1617년 조정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사카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경직은 종사관으로서 정사 오윤겸(吳允謙), 부사 박재(朴榟)와 함께 400여 명의 사행원을 이끌고 부산을 떠나 교토에 도착해 후시미[伏見] 성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다시 쓰시마로 돌아와 와니우라에서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부상록(扶桑錄)』은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을 날짜별로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형태/서지]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21.5×15.7㎝이다. 행자 수는 10행 28자이다. 『부상록』은 단독 형태로 현전하지 않고, 일본 사행록류를 모아놓은 『해행총재(海行摠載)』의 한 부분으로 수합되어 있다. 현전하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해행총재』는 총 2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상록』은 제10책에 해당한다. 10책의 표제는 이경직의 호를 써서 ‘석문부상록(石門扶桑錄)’이라 되어 있다.

[구성/내용]

『부상록』은 앞부분에 정사 이하 428명의 사행원 명단이 실려 있다. 이어 1617년 7월 4일의 일기를 시작으로, 104일의 일기 기록이 이어진다. 이에 따르면 7월 5일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6일 부산을 출발하여 쓰시마에 닿았다. 본래는 에도[江戶]까지 갈 것을 예상하였으나, 중간에 쇼군[將軍]이 후시미 성에 와 머무를 것이라는 연락을 받게 되어, 국서 전달 의식은 교토 근처에 있는 후시미 성에서 이루어졌다.

8월 21일 교토에 도착하여 26일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가 있는 후시미 성에서 국서 전달 의식을 행하고, 9월 10일 다시 교토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10월 18일 쓰시마 북단의 와니우라에서 부산으로 출항하는 것으로 일기를 맺고 있다. 마지막 날 일기에는 따로 표시는 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의 지리·토산물·풍속·언어·제도·복식 등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여타 사행록의 문견 별록(聞見別錄)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상록』은 일본 에도 바쿠후와 외교가 성립되는 초기 일본에 대한 기록이다. 최초로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내는 기록이 보여, 초기 부산에서의 통신사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일반적인 통신사 사행 여정과 다른 경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교토의 후시미 성을 들르거나, 돌아오는 길에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오기 위해 규슈[九州]의 가라츠[唐津]·나고야[名古屋] 등을 거치는 것은 다른 사행록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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