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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65
한자 壬申約條
영어의미역 Korea-Japan Trade Treaty in the Year of Yimsin
이칭/별칭 임신조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조약과 회담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심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약조
조약/회담당사자 조선 조정|대마도주
관련인물/단체 대마도주|일본 승려 붕중(弸中)
체결|제정 시기/일시 1512년연표보기 - 체결
발효|시행 시기/일시 1512년연표보기 - 체결 후 발효 및 시행
만료 시기/일시 1544년 - 사량진 왜변 발발 후 폐지됨
협상 시기/일시 1512년연표보기 - 대마도 주최로 일본국왕사가 파견되어 협상을 진행
체결 장소 조선 동평관[인현 어린이 공원] -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2가 142-1
협상 장소 조선 동평관 -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2가 142-1

[정의]

조선 전기 부산포를 비롯한 삼포 지역에서 발생한 왜변 이후, 1512년 대마도와 조선 사이에 재통교를 목적으로 체결한 약조.

[개설]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을 비롯한 삼포 왜관 지역에서 왜란이 발생하면서 조선은 삼포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경제적으로 곤란함을 겪게 된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일본 국왕 명의의 사신을 파견하여 교역 재개를 요청해 왔고, 당시 북방 민족 문제 및 왜구 활동의 재개 등을 염려한 조선 조정이 대마도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체결된 임신약조(壬申約條)는 기존의 계해약조(癸亥約條)보다 한층 제약이 강화되었다.

[체결 경위]

조선 개창 후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 만호(萬戶) 및 수군처치사(水軍處置事)를 두었다. 또한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웅천의 제포에 왜관을 설치하여 왜 사신을 접대하게 하는 등 왜인과의 통교 및 왜인의 거주지 설정 등을 통해 왜구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세종 조에 계해약조[1443년]를 체결하고 대마도 왜인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던 중 1510년(중종 5) 부산포를 비롯하여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에서는 유담년(柳聃年)황형(黃衡) 등을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고 왜관을 폐지하였다.

1512년 임신년에 대마도에서는 경제적 곤란으로 인한 재교역을 요구하며 사신을 보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통교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으나 또 다시 왜구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으로 인해 다시 대마도인과의 통교를 결정하고 임신약조를 체결하였다.

[조약/회담 내용]

조선은 대마도 측에 재통교의 조건으로 삼포왜란의 수괴자를 참하여 바칠 것, 조선인 포로를 송환할 것, 모리치카가 직접 와서 사죄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중 모리치카가 직접 와서 사죄하는 것 외에 두 가지만 이루어졌다. 즉 1512년 5월과 윤 5월에 걸쳐 삼포왜란 책임자의 수괴 18명의 머리와 대마도주의 선물 등이 전해지면서 재통교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전에 대마도인과의 통교에 대해서는 세종 조에 계해약조가 체결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삼포왜란 이후 다시 체결된 통교 조약인 임신약조계해약조와 동일할 수는 없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계해약조보다 더욱 강화된 조건으로 약조를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지급하던 쌀과 콩 200석을 100석으로 감할 것, 대마도주의 세견선 50척을 25척으로 줄임과 동시에 선부(船夫)를 감하는 것, 대마도주의 특송선을 줄이고 만약 일이 있으면 세견선에 붙여서 올 것, 대마도주의 아들 종웅만(宗熊滿)의 세견선은 3척, 도주의 조카 종성씨(宗盛氏)의 세견선은 1척으로 할 것, 수직인(受職人)은 1명으로 하고, 세견선 이하 배 1척마다 상경하는 왜인은 1명으로 할 것 등이다.

[결과]

임신약조의 체결로 인해 제포 왜관이 개방되었으나 왜인들에게 제약이 더 강화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이에 견디다 못한 대마도 왜인들은 1544년(인종 즉위년) 경상도 사량진으로 침략하는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이 발생하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제포의 형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 부산포로 왜관을 옮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임신약조는 파기되었고 이후 대마도의 재통교 요구로 다시 정미약조(丁未約條)[1547년]가 체결되었으며,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일부 시기가 단절되기는 하였지만 이후 부산 지역의 왜관에서만 왜인들과의 통교가 이루어지는 부산 단일 왜관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부산 단일 왜관 시대는 개항 후 일본인 전관 거류지 관련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신약조의 체결을 전후한 시기는 왜구 활동이 약간 다른 양상으로 재개되는 시기이다. 이를 통해 당시 왜구의 변화 양상과 그 원인 등을 국내 국외적 상황으로 되짚어 볼 수 있다. 또한 임신약조 체결 이후 사량진 왜변 발생을 계기로 왜관이 부산포 한 곳으로 한정되었고, 이는 임진왜란기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부산 단일 왜관 시대가 열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므로 부산 지역에서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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