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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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德島倭變 |
영어의미역 | Japanese Uprising in Gadeok Islan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 11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성일 |
[정의]
1508년 왜적이 동래 가덕도에 침입한 사건.
[역사적 배경]
조선 시대에 왜관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라고 한다. 왜관이 많을 때는 조선의 수도 한 곳 즉 동평관(東平館)과 경상도 연안의 항구 세 곳을 포함해서 모두 네 군데에 설치된 적도 있었다. 진해의 내이포(乃而浦) 즉 제포(薺浦)와 부산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를 통칭해서 ‘삼포 왜관’이라 불렀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경상도 연안에 머물던 일본인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사절(使節)의 왕래와 함께 물자가 몰려들자 포소(浦所)에 설치된 왜관이 돈 벌기 좋은 곳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밀무역과 정보 누설 같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 연안으로 왜적이 쳐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1506년(중종 1)에는 제주에 왜적이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1508년(중종 3)에는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왜적을 잡아 조선 조정에 바쳤다. 그 해 5월 조선은 대마도주가 보내온 삼보 나사야문(三甫羅沙也文)을 처형한 다음 효수(梟首)하여 왜인들에게 널리 보임으로써 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조선 정부가 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수록 왜인들의 반발도 심해졌다. 1508년 가덕도 왜변은 무력 충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그것이 절정에 달한 것이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이었다.
[경과]
1508년 11월 2일 왜적이 동래 가덕도에 침입하여 그곳에서 벌목(伐木)을 하고 있던 웅천 사람을 살해하고 옷과 식량을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가덕도 왜변이 일어난 뒤, 조선 조정은 이듬해인 1509년(중종 4) 3월 삼포(三浦)에 머물고 있던 우두머리 왜인 즉 두왜(頭倭)를 불러서 가덕도에 침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자가 누구인지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가덕도 왜변을 일으킨 왜인들이 조선말을 할 줄 알았으며, 큰 배를 타고 바람을 무릅쓰고 가덕도로 들어간 점을 들어서, 조선 조정에서는 가덕도 왜변을 일으킨 범인이 삼포 왜관에 장기 거주하는 항거 왜인(恒居倭人)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곳의 우두머리 왜인들 모두 가덕도 왜변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가덕도와 가장 가까운 제포의 우두머리 왜인은 가덕도 왜변이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며, 아마도 해적(海賊)의 소행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부산포의 우두머리 왜인은 가덕도가 경상우도(慶尙右道)에 있고, 자신들은 경상좌도(慶尙左道)에 살고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가덕도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11월과 12월은 청어(靑魚)와 대구어(大口魚)를 잡는 때라서 자신들은 포구에서 낚시질하고 그물질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다른 곳을 출입할 겨를이 없었다고 답변하였다. 마지막으로 염포의 우두머리 왜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가덕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바람을 무릅쓰고 그곳까지 배를 몰고 갈 수 있었겠느냐고 항변하면서, 가덕도 왜변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결과]
조선은 1508년(중종 3) 11월 가덕도로 쳐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옷과 식량을 빼앗아간 왜적을 삼포의 항거 왜인으로 추정하였으나 끝내 그들의 실체를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이때의 일이 조선에 와서 살던 항거 왜인들을 통해 대마도주에게 보고되었을 터인데도, 가덕도 왜변의 범인들에 관한 기록은 그 뒤에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 조정에서는 삼포 왜인들의 거주 지역인 왜리(倭里)에 대한 제한 구역을 정하고 경계를 넘어 출입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의의와 평가]
1508년 11월에 일어난 가덕도 왜변은 1510년 삼포 왜란의 전조(前兆) 현상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덕도 왜변 당시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2년 뒤인 1510년에 삼포 왜란이 일어났다. 삼포 왜란은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삼포에서 동시에 폭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1508년의 가덕도 왜변과 그 성격을 달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