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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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泰汶 |
영어음역 | Yang Taemun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1919년 부산 범어사 3·1 운동에 참여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양태문(梁泰汶)[1902~1941]은 1902년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서 태어나, 일찍이 범어사로 출가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양태문은 명정학교[현 청룡초등학교]의 학생이었다. 1919년 서울의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김법린(金法麟), 김상헌(金祥憲) 등이 범어사로 돌아와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등 범어사 관련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18일 동래 장터에서 장날을 기하여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평소 허영호(許永鎬)의 지도하에 있던 양태문은 역시 명정학교 학생이던 배석이와 함께 범어사 3·1 운동의 주동자인 허영호를 도와 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새벽, 명정학교 학생 오계훈의 발고로 비밀이 누설되어 일부 주동자들이 체포되었지만, 양태문을 비롯한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학생들은 18일과 19일 동래 시장 일대에서 격문을 뿌리고 만세 운동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양태문 등 많은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지만, 양태문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이후 양태문은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마치고 서울의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금정중학교 교정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와 1995년 금정구 구서1동 동래여자고등학교 앞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에 이름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