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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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尙玩 |
영어음역 | Sin Sangwan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에 범어사 서울포교당 등지에서 불교 개혁과 항일 운동을 벌인 승려.
[활동 사항]
신상완(申尙玩)[1891~1951]은 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5년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의 국청사에서 주지를 지냈으며, 1917년 영장사·천왕사·나한사의 주지를 겸임하였다. 1919년에는 수원 용주사(龍珠寺)의 승려였다. 1919년 2월 28일 밤 유심회(惟心會)를 중심으로 한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한용운(韓龍雲)에게서, 3월 1일에 결행될 기미 독립 선언에 대해 전해 들었다. 이들은 서울 인사동에 있는 범어사 중앙포교당에 다시 모여 서울의 만세 시위에 이은 불교계의 전국적인 총궐기를 실현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에 전국불교도독립운동총참모본부를 명칭으로 하는 지도적 연락 기관을 서울에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신상완을 총참모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구체적인 행동 방침을 정하였는데, 우선 각 지방으로 독립 선언서를 전달할 지역별 담당 구역을 정하였다. 여기서 부산 동래는 범어사의 김상헌(金祥憲)과 김법린(金法麟)이 맡았다. 지방 파견원은 각 사찰을 방문하여 각각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후 선언서를 다수 등사(謄寫)하여 부근의 마을 및 도시에 가서 배부하고 선언식 거행, 만세 시위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신상완을 중심으로 한 이날의 결의는 동래 지역의 범어사 3·1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 1일 신상완은 중앙학림의 학생들을 이끌고 서울 탑골 공원에서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11월 15일 신상완은 일제의 조선 사찰령[1911년 일제가 조선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을 비판하는 ‘대한 승려 선언서’를 발표한 뒤, 12월 10일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후 신상완은 1920년 ‘임시 의용 승군헌제’를 조직하는 등 상해 임시 정부 내에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923년 5월에야 석방되었다. 1951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