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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580
한자 盤松 三節祠 古文書 一括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신반송로182번길 24[반송동 143]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22년 11월 30일연표보기 - 반송 삼절사 고문서 일괄 부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
현 소장처 반송 삼절사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신반송로182번길 24[반송동 143]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수량 21점
서체/기법 필사본
소유자 남원양씨삼절사반송문회
관리자 남원양씨삼절사반송문회
문화재 지정 번호 부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의 반송 삼절사에 보관 중인 고문서.

[개설]

반송 삼절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지(梁誌)·양조한(梁潮漢)·양통한(梁通漢) 등 남원 양씨 일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에는 반송 삼절사와 관련된 고문서 21점이 남아 전해온다. 이 고문서를 분류하면 반송 삼절사 건립 및 유지 등과 관련된 자료는 삼절사 지알록(三節祠祗謁錄) 등 11건, 후대의 관직 추증 자료는 교지(敎旨) 등 5건, 삼절사에 배향된 인물의 업적과 관련된 자료는 양정랑 순절사적(梁正郎殉節事蹟) 등 4건이다. 이 자료는 조선 후기 부산의 지역사회 연구와 지방 교육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유용하다.

[형태 및 구성]

반송 삼절사 고문서 일괄 21건은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삼절사의 건립과 유지에 관련된 자료 11건이다. 삼절사 지알록(三節祠祗謁錄)은 1839년 창건 때부터 1868년까지 삼절사를 참배한 인사 99명의 본관과 거주지를 제례의 형식에 따라 적어 놓은 자료이다. 간혹 생년과 자(字)를 기록해놓기도 하였다. 동래 지역 인사가 아닌 경우에는 이름 아래에 지역을 기록하였는데, 대부분 양산, 언양, 울산, 기장 지역의 양반들이다. 마지막에 1868년 3월 30일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분향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7장이다.

삼절사 고왕록(三節祠考往錄)은 1839년부터 1852년까지 삼절사의 창건 배경과 건립 과정 및 운영과 관련된 주요 행사의 업무를 기록한 일지이다. 여기에는 삼절사 상량 때의 기둥과 지붕 건립 등의 내용, 상량문, 봉안문, 상향(尙饗) 축문과 축문을 적은 사람들의 명단, 동래 지역 사림(士林)이 감사에게 올린 청조문(請助文), 삼절사 운영을 위한 휼전답(恤典畓) 마련 등이 실려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2장이다.

삼절사 청조문(三節祠請助文)은 1840년 2월부터 1945년까지 삼절사 강당 세한당(歲寒堂)을 건립할 때 찬조한 기관과 인사의 명단 및 출연 금액이 기록되어 있다. 앞쪽에는 경상좌수영에서 소나무 벌채를 허락받은 내용, 이어서 동래부에 속한 동상면 등 7개 면과 범어사에서 찬조한 액수와 참여한 유림(儒林)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뒤쪽에는 1945년 이후 답(畓)의 매입과 각종 공사 때 찬조한 내역이 적혀 있다. 필사본 2권 1책으로 모두 21장이다.

봉안제 참재록(奉安祭參齋錄)은 1839년부터 1924년까지 삼절사 봉안제에 참여한 제관(祭官)들의 이름과 역할을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표지에는 경오(庚午)[1810]라고 적혀 있는데, 후대로 내려올수록 봉안제에 참여하는 인사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03장이다.

삼절사 사직안(三節祠祠直案)은 1839년부터 1859년까지 동래부에서 삼절사의 관리와 제향 봉행을 위하여 파견했던 고지기[이서吏胥]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된 시기는 1839, 1842, 1843, 1855, 1857, 1859년이다. 연도마다 고지기 2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필사본 7권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22장이다.

남원 양씨 외예 각신보(南原梁氏外裔閣臣譜)는 1791년(추정) 남원양씨로 조선 전기의 인물인 양성지(梁誠之)의 외손으로서 정조(正祖) 때 규장각(奎章閣) 각신을 지낸 인사들의 명단을 적은 기록이다. 여기에는 정조의 명으로 간행한 양성지의 문집 『눌재집(訥齋集)』의 어제서문(御製序文)도 실려 있다.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3장이다.

삼절사 향알록(三節祠香謁錄)은 1925년부터 1965년까지 2년 주기로 삼절사를 알묘(謁廟)한 인사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삼절사의 직제는 산장(山長), 장의(掌議), 향유사(鄕有司)였는데, 1965년부터 산장과 향유사 체제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6장이다.

삼절사 홀기(三節祠笏記)는 1838년(추정) 삼절사가 건립되어 제향이 시작된 이후부터 삼절사 사우에서 봉안되어 온 제향 절차와 물품을 기록한 홀기(笏記)이다. 앞쪽에는 헌관(獻官)과 집사(執事) 등의 의복, 자리, 참배 절차, 제관의 역할 등이 적혀 있다. 이어서 축문, 헌관과 집사 인원, 재정 등이 적혀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4장이다.

삼절사우 상량문(三節祠宇上梁文)은 1838년 삼절사우 건립 때의 상량문이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씨 문중의 양지, 양조한, 양통한 세 사람의 업적을 기려서 사우를 짓게 된 내력을 경주인 김봉희(金鳳喜)가 자세하게 지었다. 현재 삼절사에 편액으로 걸려 있는 걸려 상량문과 내용이 일치한다. 필사본 1장이다.

상절계안(尙節契案)은 1930년 삼절사에서 상절계를 시작한 이후 1970년까지 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추모 계안이다. 계안에는 충신 삼절사를 기리는 이유신(李圭信)의 서문, 좌목(座目), 51곳에서 참여한 지역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계에 참여한 인원수는 후대로 올수록 늘어나고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87장이다.

상서(上書)는 1842년 동래 유학(幼學) 양온맹(梁縕盟)과 양재맹(梁在盟) 등이 동래부사 강시영(姜時永) 혹은 오취선(吳取善)에게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양조한이 충렬사에 배향되지 못한 사정을 아뢰어서 충렬사에 배향되도록 해달라고 청원한 지역민의 청원문이다. 1장으로 되어 있다.

통문(通文)은 1842년 동래향교 도유사(都有司) 박경원(朴慶元), 안락서원 일유사(一有司) 송재형(宋在衡), 산장(山長) 김필(金泌) 등이 삼절사우가 오래되어 훼손된 것을 한탄하여 재건하였지만, 주방과 담장을 쌓는 공사 비용이 부족하여 양산과 기장의 향교․서원․문중 등에서 충절을 사모하는 의리로서 도와달라고 알리는 내용의 글이다. 1장으로 되어 있다.

둘째, 삼절사 배향 인물에게 내린 관직 추증 교지 2건, 교첩(敎牒) 1건, 시호 증시 교지(敎旨) 2건이다. 정랑공 양조한 교지(正郎公梁潮漢敎旨)는 1737년 양조한에게 통훈대부(通訓大夫) 호조 정랑(戶曹正郎)의 직을 내린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1장으로 되어 있다. 좌랑공 양통한 교지(佐郞公梁通漢敎旨)는 1758년 양통한에게 통훈대부 군자감 정(軍資監正)의 직을 내린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옆 부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양치하(梁致河)의 증조 양통한을 추증한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1장이다.

좌랑공 양통한 교첩(佐郞公梁通漢敎牒)은 1737년 학생(學生) 양통한에게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공을 인정하여 승훈랑(承訓郎) 호조 좌랑(戶曹佐郎)의 직을 내린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1장이다.

충민공 양지 증시교지(忠愍公梁誌贈諡敎旨)는 1796년 양지에게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공을 인정하여 충민공의 시호를 내려 추증하는 교지이다. 충민은 난리를 당하여 나라를 잊지 아니하였으니 충(忠)이라 하고, 백성이 다치게 됨을 슬퍼하며 살폈으니 민(愍)이라는 의미이다. 1장으로 되어 있다.

충민공 양지 증시교지(忠愍公梁誌贈諡敎旨)는 1796년 양지에게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공을 인정하여 충민공의 시호를 내려 추증하는 교지이다. 1장으로 되어 있다.

셋째, 삼절사 배향 인물의 업적과 관련된 자료이다. 양정랑 순절사적(梁正郎殉節事蹟)은 1730년(추정)에 동래부사 이덕향(李德響)이 임진왜란 때 동래향교의 훈도(訓導)로서 공자(孔子) 등의 신위(神位)를 옮겨 숨기고서 순절했던 양조한 관련의 기록이다. 양조한의 업적을 적은 행장(行狀), 양공가장(梁公家狀)에서 조하위(曺夏瑋)가 옮긴 글이 실려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9장이다.

양정랑 좌랑전 병서(梁正郎佐郞傳幷書)는 1829년부터 1839년 사이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삼절사(三節士) 양지·양조한·양통한의 행적, 추증 내력, 송공단(宋公壇) 추향(追享), 포상 등의 사적을 1831년 홍희조(洪羲祖)가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의 양공제문(梁公祭文)과 상향축문(尙饗祝文)은 이명적(李明迪)이 지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7장이다.

삼절유적(三節遺蹟)은 연대가 미상이다. 삼절사에 모신 양지, 양조한, 양통한과 관련된 행적을 동래 거제리 거주의 족인(族人) 4명이 기록한 것이다. 책은 앞쪽의 양정랑좌랑전병서(梁正郎佐郞傳幷書)와 뒤쪽의 양씨삼절유적(梁氏三節遺蹟)으로 되어 있다.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3장이다.

임진순절 제인 사적록(壬辰殉節諸人事蹟錄)은 1736년(추정)에 임진왜란 때 동래부에서 순절한 인사에 대한 사적을 『충렬사지(忠烈祠志)』를 참조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한 양조한과 양통한뿐만 아니라 문덕겸(文德謙)과 송백(宋白) 등의 사적도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7장이다.

[특징]

반송 삼절사 고문서 일괄 21점은 조선 후기에 사족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한 기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알려주는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 필사본으로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2022년 11월 30일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유산자료로 일괄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는 국가 차원에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재생하면서 성리학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때 지역사회에서도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인물의 사우(祠宇)이나 서원(書院)의 건립과 사액(賜額), 정려(旌閭), 관직 추증, 시호(諡號) 추시(追諡), 순절 관련 기록의 편찬 등을 진행하였다. 반송 삼절사는 건축물의 외형적인 측면이 중시되어 이미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와 함께 반송 삼절사에 남아 있는 21점의 고문서는 여러 의미가 있다.

먼저 조선 후기에 반송 삼절사 규모의 사우가 전국적으로 건립되었지만, 반송 삼절사처럼 관련 자료가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반송 삼절사의 건립, 관리, 운영 체계, 출입한 사족의 동향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는 점은 의미가 크다. 특히 사우의 일지 등이 지속적으로 쓰여 보관·관리되어 온 것은 반송 삼절사가 조선 후기 이후 사족 지배체제 유지를 위한 기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계속해 왔음을 알려준다. 이런 자료의 존재는 지역사회에서 드문 경우여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이들 자료는 필사본으로서 유일한 자료이므로 서지학적으로도 귀중한 가치가 있으며, 부산의 지역사 연구와 지방 교육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도 유용하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은 동래 지역에서 전개되고 지속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임진왜란과 연관된 유적과 유물은 중요한 의미를 띤다. 부산에는 임진왜란을 기억하는 공간으로서 국가 차원의 충렬사와 안락서원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개인이나 문중 차원에서 전쟁을 극복하고 이를 기억하면서 전승해 나온 흔적을 간직한 기록은 많지 않다. 반송 삼절사에 모셔진 양지, 양조한, 양통한의 업적, 사우 건립과 유지 및 관리 등과 관련된 자료들은 이런 측면에서 중요성이 있다. 이 자료들은 임진왜란으로 순절한 인물들에 대한 기념과 기억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될 때 건립되어, 지역사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전승된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반송 삼절사 자료에는 1839년 이후 동래 지역의 유림(儒林)의 명단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조선 후기 동래 지역 유림의 교유와 지역사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살펴볼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사회 구조와 변화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아울러 임진왜란 이후부터 현재까지 동래 지역 향반(鄕班) 사회의 지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아울러 교지와 시호(諡號) 자료는 조선 시대의 관료정치와 양반사회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으로 순절한 인물들에 대해 관직을 추증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도 기념과 기억이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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