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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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盧氏 |
영어의미역 | Gwangju Nosi|Gwangju N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주영택 |
[정의]
노해를 시조로 하고, 노사원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광주 노씨(光州盧氏) 시조 노해(盧垓)는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신라로 와서 도시조 노수(盧穗)의 첫째 아들로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노해를 시조로 하고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그 후 계대(繼代)가 실전되어 후손 중 고려 때 정승을 지낸 광주군(光州君) 노만(盧蔓)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대호군(大護軍) 노서(盧恕)를 1세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라졌다.
노만의 후손은 노승조(盧承肇)를 파조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와 노승관(盧承綰)을 파조로 하는 헌납공파(獻納公派)로 분파되었다. 노서의 후손은 노숭(盧崇)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여 분파되었는데, 첫째 아들 노상인(盧尙仁)은 양근공파(楊根公派), 둘째 아들 노상의(盧尙義)는 참의공파(參議公派), 셋째 아들 노상례(盧尙禮)는 사간공파(司諫公派), 넷째 아들 노상지(盧尙智)는 경력공파(經歷公派), 막내아들 노상신(盧尙信)은 판관공파(判官公派)이다.
[입향 경위]
11세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1547년(세조 3) 을사사화에 휩쓸려 파직되고 순천으로 귀양 갔다. 사색당파에 언제 멸문의 화를 당할지 몰라서 그는 두 가족과 동생 노극신(盧克愼)[1524~?] 가족을 데리고 1690년(숙종 16) 경상북도 상주 화녕(化寧)에서 울산 서생(西生)으로 이주하였다. 1700년(숙종 26) 무렵 노극신의 손자 노사원(盧思遠)이 서생에서 기장 송정으로 이거하여 광주 노씨 대재공파(大哉公派) 입향조가 되었다.
[현황]
1934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된 『朝鮮の姓』의 동래군조에는 기장면 송정리에 18호가 거주한다고 했으며,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광주 노씨가 우거(寓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광주 노씨는 2,235가구에 7,327명[남 3,769명, 여 3,558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현재 광주 노씨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에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송정동 사원대재공파 문중 회관의 1층에 재실을 마련하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제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