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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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德島洞新安朱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ce area of Sinan Ju clan in Gadeokdo-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천성 마을|대항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기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 있는 신안 주씨 세거지.
[개설]
주씨(朱氏)의 본관은 여럿 있지만 모두 신안 주씨(新安朱氏) 분파로서 능성파, 웅천파, 전주파로 분류한다. 시조는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潛)으로, 대성리학자인 주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의 증손자이다. 주씨의 원류는 중국 전욱제(顓顼帝)[BC 2999~BC 1000?)로부터 시작하여 32세 주자(朱子)의 8세손 주회(朱瓌)에 이르기까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약 3,70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안 주씨는 우리나라 유교에 큰 바탕이 된 남송(南宋)의 성리학 대가인 주자학(朱子學)의 창시자 휘국공(徽國公) 주희를 시조로 하며, 우리나라에 정착한 입국조는 주희의 둘째 아들인 주야(朱埜)의 손자 주잠(朱潛)의 부인 양씨(楊氏)의 아들인 5세손 주여경(朱餘慶)으로 본다. 주여경은 1240년경 고려에 입국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여경 아들의 6세손 주흔(朱忻)이 문과에 합격하여 병부 상서와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지내고, 7세손 주인원(朱印遠)은 문과를 거쳐 한림학사, 안주 병마판관(安州兵馬判官), 예부 시랑(禮部侍郞) 겸 경상 안렴사(慶尙按廉使) 겸 권농사(勸農使)와 삼사(三司)의 좌윤(左尹)을 지냈으며, 8세손 문헌공(文獻公) 주원지(朱元之)는 문과를 거처 이부 상서를 역임하였다. 9세손 주사충(朱思忠)은 문과를 거처 예부 좌랑, 호부 상서,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하여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주여경의 10세손 주문익(朱文翊)은 공민왕 때 문과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세자 사부(世子師傅)가 되었다. 11세손 주자정(朱子精)은 문과를 거처 조선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의정부 좌찬성(左贊成)과 의금 부사로 웅성군(熊城君)에 봉하여졌다. 12세손 주인(朱璌)은 문과를 거처 진주 목사가 되고, 14세손 주서(朱序)는 문과를 거처 사헌부 감찰을 거쳐 황해 어사가 되었다. 15세손 주내근(朱乃謹)은 진사 문과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연일 현감을 지냈다. 이렇게 신안 주씨는 고려 때 귀화한 후 대를 이어 줄곧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명칭 유래]
강서구 가덕도동 천성(天城) 마을은 조선 중종(中宗) 때 천성진(天城鎭)을 설치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천가 마을에 인접해 있는 대항(大項) 마을은 행정동인 가덕도동 10통 지역이다. 가덕도 남쪽에 있는 가장 큰 목에 해당하는 마을로, 큰 목이라는 데서 한자로 기록하여 대항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19세손 주몽룡(朱夢龍)이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 조산대부(朝散大夫), 금산 군수가 되고 유원진 병마절제사(柔遠鎭兵馬節制使)가 되었다. 증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 판서가 되며 ‘무열(武烈)’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진주 서원(晉州書院), 평천 서원(平川書院), 충렬 서원(忠烈書院)에 배향되었다. 주몽룡의 손자 주선(朱仙)이 1640년경 가덕도에 입향하여 370여 년간 세거지를 이루었으며, 이후 인근의 두문 마을이나 세바지 마을로 이거하였다.
[자연 환경]
가덕도동 천성 마을과 대항 마을은 세로로 붙어 있는 마을이다. 서쪽은 바다와 인접하고, 나머지는 산지로 덮여 있다. 천성 마을은 동쪽은 연대봉과 매봉, 북쪽은 웅주봉, 남쪽은 성포봉이 자리한다. 대항 마을은 북쪽이 성포봉이고, 동쪽은 바다이며, 남쪽은 국수봉이 있다.
[현황]
한창 가문이 번창할 때에는 가덕도동의 천성 마을과 두문 마을, 행정동인 가덕도동 10통 지역인 세바지 마을과 대항 마을을 합하여 70~8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젊은 사람이 외지로 나가 2013년 현재는 40~50여 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