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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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元默 |
영어음역 | Gim Wonmuk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401[좌천동 68-1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지금의 김원묵기념봉생병원을 설립한 의사.
[가계]
할아버지는 김락서이고, 아버지는 김은필이다. 부인은 석신덕이다. 자녀는 김낸시로 현재 김원묵기념봉생병원 이사장이다. 사위 정의화는 제15~19대 국회 의원, 국회 부의장, 봉생병원 원장을 지냈다.
[활동 사항]
1. 가계와 학력
김원묵(金元默)은 1924년 9월 5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소용리 대막골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사망하여 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할아버지 김락서는 대막골에서 봉생의원을 개업한 한의사로서 한학에도 능통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하였다.
유복하게 자란 김원묵은 8세까지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수학하다가 대막골에서 약 4㎞ 떨어진 전천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기독교 감리교회재단에서 운영하던 5년제 사립 학교인 평양의 광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 시절에는 검도부 주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1941년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의사이자 침술가로도 이름을 날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학에 입문한 것이다.
평양에는 8·15 광복과 함께 중국, 만주 등지로부터 많은 동포들이 귀국하여 평양역 주변은 물론 빈터마다 임시 천막촌이 곳곳에 세워졌다. 소련군의 진주 후 당시 평양에는 지주층을 비롯하여 많은 의사들이 월남하였다. 평양의학전문학교 4학년이던 김원묵은 평양역 주변의 피난민을 위해 의대생들을 모아 방역반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1946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모교에 조교로 머물면서 평양도립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김원묵은 훗날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은사인 장기려(張起呂) 박사를 만났다. 장기려 박사는 당시 평양도립병원 원장 겸 외과 과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김원묵에게 인격 면에서나 의학 면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간호원 기숙사에 난입하여 간호원을 강제 추행하려던 소련군들을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남한으로 탈출을 결심하고 1947년 홀로 평양을 탈출하였다.
2. 군의관으로 활동
김원묵은 서울에 도착하여 명동에 개인 병원을 개업한 평양의학전문학교 선배 신기락을 만나 그의 조수로 일하였다. 1949년 초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적산 가옥을 소유하고 있던 석순애를 소개받아 가옥 일부를 병원으로 고쳐 봉생소아과의원을 개업하였다.
집주인인 석순애는 번창하는 병원 뒷바라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큰 힘이 되어 주었고, 병원 일이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동생 석신덕이 김원묵의 일을 거들게 되었다. 얼마 후 김원묵은 세 살 아래의 석신덕과 결혼하였다.
김원묵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기도 평택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군에 자원입대하였다. 1950년 12월 27세로 육군 중위 계급의 군의관이 되어 당시 마산여자고등학교에 자리 잡은 제2육군병원에 배속되었다. 마산 시절에 그의 유일한 혈육인 김은경[후에 낸시로 개명]이 태어났다.
이듬해 대위로 진급하면서 춘천 제1야전병원 신경외과반으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당시로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신경외과학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이론과 임상 경험을 익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휴전 이후 수도육군병원 신경외과로 전입하여 근무하다가 1955년 12월 미국 월터리드(WALTER RIED)육군병원에 유학하여 신경외과 분야의 첨단 의학을 익히고 이듬해 8월 귀국하여 소령 진급과 함께 부산 망미동의 제3육군병원[현 국군부산통합병원] 신경외과 과장으로 부임하였다. 군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외과 부장과 진료 부장을 거쳐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3. 봉생신경외과의원 개업
당시 부산에는 군 병원의 군인 환자 못지않게 두부 및 척추 손상을 입은 일반 환자들이 많았으나 마땅한 치료 기관이 없었다. 6·25 전쟁 이후 대부분의 의료 인력이 군에 징발되었고 휴전 이후에도 많은 의사가 군 병원에 소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당시는 군의관이 야간 병원을 개업할 수 있었다. 김원묵은 제3육군병원에 발령받은 1956년 범일동 매축지 입구 오버브릿지 부근에 야간에만 문을 여는 봉생신경외과의원을 개업하였고 이듬해 현재의 김원묵기념봉생병원 자리인 동구 좌천동 68-11번지에 2층 목조 건물을 지어 확장·이전하였다.
1960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3년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였고, 1964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취득과 함께 대령으로 진급한 뒤 제3육군병원 병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본격적인 산업화와 도시화로 신경외과 환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산 지역에 신경외과라고는 봉생신경외과가 유일하였기 때문에 김원묵은 군 병원보다 봉생신경외과의 환자 치료에 거의 매일 밤을 새워야 하였다. 결국 17년간의 군의관 생활을 접고 1967년 9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봉생신경외과에 전력하였다.
1972년 대한신경외과학회 학회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 교수로 매주 출강하고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 출제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지역 사회의 시민 체육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부산시 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맡았고, 국제로타리클럽 회원으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74년 9월 말부터 6주 과정의 세계침술학회 연수 과정이 경희대학교에서 개최되자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평소 한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원묵은 침술 연수에 참여하여 11월 2일 과정을 수료하고 청량리 대왕 빌딩 내 브라운 호텔 숙소에서 귀가를 준비하다가 그날 밤 발생한 대왕 코너 화재로 1974년 11월 3일 향년 51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52년 은성 화랑 무공 훈장, 1953년 금성 화랑 무공 훈장, 1962년 대통령 근무 공로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항상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 환자는 언제나 나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이 환자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의무이다”라는 말을 남긴 김원묵의 일생을 기리기 위해 그가 설립한 봉생신경외과병원을 1983년 11월 1일 김원묵기념봉생병원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한국인 이름을 기념하는 최초의 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