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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동 분절 마을 창녕 조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87
한자 菉山洞粉切-昌寧曺氏世居地
영어의미역 Noksan-dong Chang-nyeong Jo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분절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녹산동 분절 마을 창녕 조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분절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었던 창녕 조씨 세거지.

[개설]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이다. 조계룡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이예향(李禮香)으로 창녕현(昌寧縣) 고암촌(鼓岩村)에서 태어났다.

이예향이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뱃속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胎氣)가 있었다. 어느 날 꿈속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나라의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에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그 뒤에 달이 차서 626년(진평왕 48)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 밑에 조(曺) 자가 붉게 쓰여 있었다. 이것을 본 이광옥이 이상하게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을 ‘조’, 이름은 ‘계룡’, 자(字)는 ‘인경(鱗卿)’이라 특별히 하사하였다.

뒤에 왕이 부마(夫馬)를 삼으므로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 대도독(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 총지휘제군사(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太子太師)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조계룡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창녕(昌寧)으로 하였다.

[명칭 유래]

분절(粉切) 마을의 명칭은 옥녀봉(玉女峰)과 관련이 있다. 옥녀봉에는 풍수적 형세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옥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비단 병풍[금병산]을 치고 마을 앞 우물에 얼굴을 비추며 마을 건너 빗골[미음 마을 쪽의 즐골]의 빗으로 머리를 빗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옥녀(玉女)가 머리를 빗질한다는 의미로 ‘가루 분(粉)’에 ‘빗 즐(櫛)’ 자를 써 ‘분즐(粉櫛)’이라 하다가, 일제 강점기에 분절로 바뀌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1800년경에 중시조의 29세손 조연(曺演)이 창원에서 녹산 분절 마을에 입향하여 210여 년간 세거하였다. 문중의 인물로는 33세 독립운동가 남강(南崗) 조정환(曺正煥)과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 조성환(曺成煥) 형제, 그리고 초대 제헌 국회 의원을 한 34세 조규갑(曺奎甲)이 있다.

[자연 환경]

분절 마을 북서쪽의 옥녀봉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북쪽과 서쪽으로 뻗어 있고, 남동쪽으로는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서쪽에는 장유와 연결된 태정 고개가 있으며, 마을의 동남쪽 산자락에는 분절 저수지가 있다.

[현황]

집안이 번창할 당시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2013년 현재는 미음 산업 단지 조성으로 세거지가 수용되어 타지로 떠나고 남강 유림이 주축이 되어 조정환을 제사 지내는 남강재(南崗齋)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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