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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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生醫院 |
영어의미역 | Jesaeng Hospital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1877년 부산 지역에 일본 정부가 설립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
[설립 목적]
제생의원(濟生醫院)은 먼저 일본에서 조선에 건너간 자국민[일본인]을 병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 다음 조선인에게 일본의 선진 의술을 베풀어 조선의 개화를 유도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876년 11월 13일 일본 정부는 부산 제생의원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제생의원은 용두산 아래 옛 초량 왜관 건물 한 동에서 1877년 2월 11일에 개원하였다. 지금은 병원이 있었다는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그 위치는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2가 9번지 한일주차장과 그 동쪽 상가 건물 일대이다. 개원 후 내원하는 환자가 급증하여 1880년 인근 용두산 남쪽 기슭의 장수통(長手通) 변천정(辨天町) 2정목(二丁目) 2번지 다완요지(茶碗窯址)에 병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다. 지금의 중구 광복동 2가 2번지 로얄 호텔 자리이며, 이곳은 후일 수차례 병원의 명칭이 변경되어 1936년 서구 아미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56년 동안 부산 의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 외무성은 제생의원의 운영 경비로 매년 5,000원(圓) 정도를 지원해 왔으나 재정 긴축 정책에 따라 조선의 각 개항장에 설립한 관립 병원을 폐지하기로 하고 1885년 4월 30일 제생의원의 폐지를 공포하였다. 동시에 ‘공립 병원 설립 계획’이 추진되어 1885년 10월 1일 부산공립병원(釜山共立病院)을 개원하였다. 이에 따라 폐지 공포 이후에도 환자의 진료를 계속하여 오던 제생의원은 동년 9월 30일부로 폐지되었다.
비록 제생의원이 개원 8년 만에 폐지되었으나 소유 토지와 건물, 의료 장비, 약품, 비품 등 일체를 부산공립병원에 무상 대여하거나 원가 이하로 불하하였고, 또한 부산공립병원이 명목상 거류민들이 설립하고 운영한 병원이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일정 기간 보조금을 지급받았으며 영사관으로부터 관리와 감독을 받았다. 따라서 부산공립병원은 운영 주체가 일본 외무성에서 부산 거류민으로 변경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제생의원의 폐지와 동시에 이를 계승하여 재개원한 것이라고 하겠다.
1894년에는 병원의 이름을 부산공립병원으로 개칭하였고, 부산거류민단을 설립함에 따라 1906년 12월 10일 부산거류민단립병원(釜山居留民團立病院)으로 또다시 개칭하였다. 일제의 조선 병합 이후에는 부제(府制)가 실시됨에 따라 1914년 4월 1일부로 부산부립병원(釜山府立病院)으로 개편하였고, 해방 이후에 부산시립병원으로 다시 개편하였으며, 6·25 전쟁 이후에는 부산의료원과 부산대학교병원으로 각각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제생의원은 당시로는 일본에서도 흔치 않은 가장 최신식의 의료 기구와 약품을 구비한 근대식 병원이었다. 병원에는 진료실, 입원 병동, 기타 부속 시설 등 시설이 제법 잘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의약품과 치료 기기도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수준으로 구비되어 있었으며, 병원 도서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제생의원은 개원 이후 처음에는 일본 해군에서 운영하였다. 일본 외무성이 운영 경비를 지원하는 관립 병원이었지만 실제로는 군의가 주재하였고, 초대 병원장으로 일본 해군 군의관 야노[矢野義徹]가 파견되었다. 야노는 1879년 10월 이임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해군 군의관 도츠카[戶塚積齋], 마츠마에[松前穰], 가지[加治木敬介]가 1883년 4월까지 차례로 병원장으로 근무하였다.
진료는 매일 오전 9시에 시작하여 오전 11시에 쉬었다가 정오 12시에 재개하여 오후 2시에 문을 닫았으며, 일주일에 한 번 휴업하였다. 특이한 점은 조선인[조선 돈 3푼[文]에서 20푼까지]과 일본인[6전 이상]의 약값에 차등을 두어 조선인을 대우하였으며, 특히 형편이 어려운 조선인의 경우 후불도 가능하도록 하였다. 제생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숫자가 비슷했다.
개원 한 달여 만인 1877년 3월에는 전문(前文)과 7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종두 조례(種痘條例)」를 제정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최초의 종두시술 규정이다. 제생의원에서는 매월 15일 종두를 시술하다가 횟수를 매월 5회[2일, 8일, 14일, 20일, 26일]로 대폭 늘렸으며, 비용은 받지 않았다. 당시 제생의원에서 종두를 시술한다는 소식은 제법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종두 및 근대 의학 교육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 처음 종두법을 전수받은 곳이 바로 제생의원이었다. 그는 1879년 10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종두술이 시술되던 제생의원에서 종두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았다.
종두 시술 외에도 제생의원에서는 콜레라에 감염된 환자의 치료와 그 예방을 위한 소독 등 방역상의 활동을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콜레라 유행에 대한 예방과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제생의원의 방역 활동은 조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또한 당시 외교 고문으로 있던 묄렌도르프의 요청에 의해 세관리(稅關吏)의 의료 촉탁(醫療囑託)을 맡게 되어 세관에 근무하는 영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청국 등의 역원(役員)들이 내원하여 진료를 받았다. 또한 검시도 10여 건이 있었다.
제생의원의 운영은 1883년에 해군에서 육군으로 소관이 이전되었다. 진료 대상을 영사관 직원 외에 일반 조선인과 일본 거류민이라 명시하였고, 병원을 진료, 통역, 계산, 약제과 등의 4개 과로 구분하는 등 개원 초기에 비해 보다 체계적인 운영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 제생의원은 개원할 때부터 조선인을 진료 대상에 포함시켰으며, 약가 산정이나 병실 구조에서 조선인을 고려하였고, 종두 보급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 설립 목적과 활동을 보면 단순히 부산의 일본 거류민 치료를 위한 의료 기관을 넘어 조선 침략을 위한 조선인 회유나 개화 유도 등 계몽적·전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본이 대조선 외교의 한 방편으로 제생의원을 인식하고 활용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