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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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洛東江海苔漁業組合 |
영어의미역 | Nakdonggang River Nori and Fishing Associati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 |
시대 | 근대/개항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었던 해태 양식업자 조합.
[개설]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는 다양한 어업 기관이 설립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해태(海苔)[김] 양식이 보급되자 이를 관리하기 위한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즉 낙동강 하류에 해태 양식장을 둔 동래군 사하면 낙동강해태어업조합과 동면다대어업조합, 김해어업조합[명지면어업조합] 등이 그것이었다.
그 외 수산 단체로는 1917년 10월 26일 업종별 단체로 경남해조수산조합(慶南海藻水産組合)이 부산의 동광동 1가에 설립되었다. 이는 해조류 거래의 개선 발전을 꾀할 목적이었다. 1921년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이 영도 남항동에 설립되었다. 1922년 11월 30일 부산어업조합이 설립되었는데, 그 주권은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1924년 8월 가덕도 천가면에서 눌차리(訥次里)어업조합을 설립하였는데, 그 당시의 조합원은 140명이었다. 1938년 5월 눌차리어업조합은 가덕도어업조합으로 개편되었다. 1930년 4월 21일 ‘다대포어업조합’을 설립하였다. 1931년 1월 6일 경상남도 어업조합연합회가 부산의 대교동에 섰다.
[설립 목적]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은 김 양식업자의 권익 옹호와 생산지도 및 판매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22년 11월 11일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을 설립하였다. 그 후의 해체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의 구역은 괴정·하단·신평·엄궁 등의 해태 양식 지역이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김 양식을 시작한 것은 일본인 이학 박사 오카무라[岡村金太郞]에 의해서였다. 그는 1911년 12월 낙동강 하구를 시찰하고, 1913년부터 경상남도 사업으로 김 양식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자 민간인이 참여하여 김 양식을 하게 된 것이다.
김은 국내 소비보다 일본으로의 수출이 컸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김 양식에 관한 시험과 제조법에 관해 적극적이었다. 1927년부터는 김 양식업을 장려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에 따라 김 양식업은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낙동강 하구 김 양식은 대나무를 세워 김이 착생하게 하는 일본홍(一本篊) 양식법이었다. 『조선어업조합요람(朝鮮漁業組合要覽)』[조선어업조합중앙회, 1942]에 실린 낙동강해태어업조합[1922년 11월 조직]의 연혁에 의하면, 낙동강 하구의 해황(海況), 수질 등이 김 양식에 적합할 것 같이 보여 1912년에 일본인 도마리[泊友吉, 시즈오카 현 출신]가 처음으로 해장죽(海藏竹)[일본명 여죽(女竹)]을 꽂아서[건홍(建篊)] 김 양식을 시도하였으나 양호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 1년 만에 중지하였다. 그 이듬해에 도(道) 수산과의 지도하에 당시 하단리 거주의 한 일본인이 시험하여 성적이 양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빛깔과 향기로운 맛이 일본 도쿄 아사쿠사 김에 손색이 없는 김을 양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방민의 양식업 경영을 장려하였다. 이후 1925~1926년 무렵부터 지방의 한일 양국인 사이에 김 양식업이 보급되고, 해마다 김 양식업자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김 양식은 영세 경영에 적합한 양식 종목이었기 때문에 낙동강 하구 거주 어민이 거의 독점하였다.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의 해태 생산액은 1929년 약 6만 원으로, 전조선 해태 어장 중 10위의 위치에 있었다. 1932년 낙동강해태어업조합에서 생산한 김이 백만 배를 돌파하였다. 1933년 『동아 일보』 기사에 의하면, 낙동강 하류 3개의 해태어업조합에서는 작년도의 해태 풍작으로 금년에 많은 홍죽(篊竹)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홍죽 건립 수는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은 190만 본, 다대해태어업조합은 70만 본, 명지면어업조합은 약 90만 본이었다. 그러나 1934년 낙동강 해태 작황이 좋지 않아 작년도에 비하여 1/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전업자가 속출하였다.
[의의와 평가]
낙동강 연안에는 다양한 어종의 수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양식업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하류에는 김이, 가덕도에는 굴이, 하단에는 뱀장어가 양식되었다. 특히 김은 일본인의 기호 식품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지원이 많았다. 한편 김 양식은 영세한 조선 어민에게는 본인의 자본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부산 낙동강 연안의 어민들 대부분이 김 양식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김 양식이 지금까지 부산의 명물로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은 일제 강점기 김 양식의 보급과 관리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