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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동 창원 구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534
한자 德浦洞昌原具氏世居地
영어의미역 Deokpo-dong Changwon Gu Clan Hometow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영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2~3가구
세거지 덕포동 창원 구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는 창원 구씨 세거지.

[명칭 유래]

덕포의 옛 이름은 ‘덕개’다. ‘덕(德)’은 언덕·두덕·부(阜)의 차자(借字)[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음이나 훈만을 빌려다 쓰는 글자]다. 즉 언덕개라는 말로, 언덕에 있는 포구를 뜻한다. 한편 이 일대가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큰 포구여서 크다는 의미의 덕(德)을 붙여 덕포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덕포동 창원 구씨(昌原具氏) 입향조는 구맹립(具孟笠)[구영취(具榮鷲)의 증조 할아버지]다. 선대 분묘가 구포에 있는 것으로 보아 구맹립은 임진왜란 이전에 덕포동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구영취는 유학에 힘쓰면서 아울러 무예를 익히고 국가 유사시에 문무겸전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 아들[구응진, 구응남, 구응달]을 데리고 동래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혈전을 벌였다. 성이 함락되자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황산도 소산역[금정구 선동 하정 마을] 부근 소산 전투에 참가하여 황산도 수송로를 차단하는 유격전으로 다른 의병 부대와 연계 작전을 펼쳤다. 난이 끝나자 전공을 인정받아 선무 원종 3등 훈에 오르고 훈련원 첨정에 증직되었다. 효자인 구주성(具周星)과 사상의 연구계, 구동계 좌안을 개서(改書) 배첩한 구봉상(具鳳祥)이 후손들이다.

[자연 환경]

덕포동 동쪽에 백양산이 있고, 서쪽은 낙동강 사상 공단 유수로와 경계를 이룬다. 시가지는 동쪽 백양산 기슭과 낙동강변 저지대에 발달하였다. 서쪽 저지대는 습지로 이용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제방을 쌓으며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현황]

2013년 현재 덕포동에는 창원 구씨 2~3가구가 산다. 사상 향안에 20명이 실려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후손들 대부분이 동래구 동상면 석대리사상구 감전동으로 이거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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