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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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坮洞昌原具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Seokdae-dong Changwon Gu Clan Hometow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영택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있는 창원 구씨 세거지.
[명칭 유래]
석대(石臺)란 지명은 일찍이 사용하여 왔으나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다. 대(坮)는 대(臺)의 고어로, 지역 내에 지명처럼 돌로 쌓은 높은 곳이나 이에 준하는 넓은 반석(盤石) 등의 지형과 관련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수는 없다. 석대동 앞으로 흐르는 석대천과 추마산 기슭 대리골에서 흘러온 하천이 석대교를 지나가는데, 이곳에 반석처럼 깔려 있는 높은 너럭바위가 양쪽에 있어 석대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창원 구씨(昌原具氏) 시조는 구성길(具成吉)이다. 945년(혜종 2) 권신 왕규의 전횡을 서경의 대광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입경하여 토벌한 공으로 의창군에 봉하여졌다. 의창이 창원으로 개칭되면서 후손들이 이곳을 본관으로 한다. 구종길과 구원길의 아들 대에 부사공파, 진사공파, 승지공파, 처사공파로 나뉘어 전국 각처에 세거하고 있다. 구종길의 큰아들 구복한이 강계 도호부사를 역임하였기에 후손들은 창원 구씨 부사공파 파조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부사공파 구맹립이 덕포동으로 이거하였고, 구맹립의 8세손인 구지(具祉)가 19세기 초반 동래부 동상면 석대리로 이거하여 이곳 입향조가 되었다. 구지의 5대조가 구영취(具榮鷲)이다. 구영취는 유학에 힘쓰면서 무예를 아울러 익히고 국가 유사시 문무겸전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 아들[구응진, 구응남, 구응달]을 데리고 동래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혈전을 벌였다. 성이 함락되자 성벽을 뛰어넘어 황산도 소산역[금정구 선동 하정 마을] 부근 소산 전투에 참가하여 황산도 수송로를 차단하는 유격전으로 다른 의병 부대와 연계작전을 펼쳤다. 전공을 인정받아 선무 원종 3등 훈에 오르고 훈련원 첨정을 증직받았다.
[자연 환경]
석대동은 북쪽으로 산지가 발달하였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석대천으로 유입한다. 석대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반여동과 반송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산지에서 흐르는 소하천 유역과 석대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상리 마을, 하리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자리 잡았다.
[현황]
2013년 현재 석대동에는 창원 구씨 4가구가 살며, 동래 문중[동래·기장 포함] 전체로는 150가구 정도 된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동상면 석대동에 창원 구씨 4가구가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 창원 구씨 부사공파 동래 문중에서는 해운대구 석대동 산104-4번지 일대에 임란왜란에서 활약한 응진공 묘역 및 구영취 기적비와 정려가 내린 구주성 정효비 그리고 창원 구씨 부사공파 제단비를 세워 창원 구씨 충효원(忠孝園)을 조성하였다. 석대 선영 부사공파 제단에는 입향조 구맹립[6세조]에서부터 구응달[10세조]까지 모신다. 제향은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