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507 |
---|---|
한자 | 屛山里曲阜孔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Gokbu Gong Clan in Byeongsan-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공영순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에 있는 곡부 공씨 세거지.
[개설]
공자(孔子)의 53세손 연성공 공완(孔浣)의 첫째 아들인 공사회(孔思晦)는 중국에서 세거를 계승하고, 둘째 아들인 공소(孔昭)는 원나라 순제(順帝)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노국 공주(魯國公主)를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다. 공민왕은 공소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회원군에 봉하고 창원(昌原)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이것이 한국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이때 공소의 한자가 ‘공소(孔昭)’에서 ‘공소(孔紹)’로 바뀌었는데, 이는 고려 제4대 광종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노국 공주의 공씨와 같은 조상이라고 하여 1794년(정조 18)에 다시 곡부(曲阜)를 본관으로 하였다. 곡부 공씨(曲阜孔氏)의 유명 인물로는 공부(孔俯), 공은(孔㒚), 공서린(孔瑞麟) 등이 있다.
[명칭 유래]
병산리의 옛 이름은 비단골로, 아름다운 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친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공자의 67세손 공계남(孔戒南)이 울주군 서면에서 아들 셋을 낳고, 큰아들 68세손 공학성(孔學省)이 부산 기장군 삼동면[현 기장군 정관읍]에 이주하여 아들 4명을 낳았다. 공학성이 부산 기장에 입향하였을 때가 1777년이다. 위로 두 아들은 절손되었고, 셋째 69세손 공순봉(孔順鳳)과 70세손 공수인(孔守仁)이 철마면으로 이거하였다. 또 71세손 공성빈(孔聖彬)과 72세손 공노언(孔魯彦)이 지금의 기장군 일광면 산곡리 이주하여 아들 넷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72세 공노언의 부인 달성 서씨(達城徐氏)가 넷째 73세손 공장완(孔章完)을 업고 친정 마을인 웅상면 매곡리 이근 마을[현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널밭)]에 이주하면서 병산리 곡부 공씨 세거지(屛山里曲阜孔氏世居地)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74세손 공치홍(孔致洪), 75세손 공대일(孔大一), 76세손 공성주(孔聖冑), 77세손 공재완(孔在完)이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에서 살고 있다.
[자연 환경]
병산리는 동쪽의 석은덤[543m]과 북쪽의 산지, 북서쪽의 방산재 등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사방의 산지에서 흘러내린 소하천이 남서쪽의 좁은 계곡으로 흐르며 기장에서 가장 긴 좌광천의 상류를 형성한다. 병산리의 북서쪽 골짜기는 풍광이 수려하여 예부터 비단골 또는 금동(錦洞)으로 불렸으며, 좌광천 발원지이다. 마을의 남서쪽으로는 들이 있었는데, 1942년 병산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수몰되었다.
[현황]
76세손 때까지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는 대부분 공씨가 세거지를 이루었으나 동부산 컨트리클럽, 가든 타운 등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볼 수 없다. 또한 후손들은 사업 또는 직장 때문에 외지로 나가고 거의 살고 있지 않다. 75세손이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지자 77세손 공재완이 정미소를 접고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는 재실인 학사재(學思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