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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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栢吉里牛峰金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Ubong Gim Clan in Baekgil-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백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구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백길리에 있는 우봉 김씨 세거지.
[명칭 유래]
백길리의 옛 이름은 박길리(朴吉里)다. 박(朴)은 박실[朴谷]·배미산·배산·바리산 등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밝다’의 옛말이고, 길(吉)은 ‘길 영(永)’의 뜻을 받아 ‘밝은 고개의 긴 안쪽’, 즉 양지의 안쪽 마을이란 의미가 된다고 본다. 실제 백길리는 와여리에서 웅천리로 통하는 긴 협곡의 안쪽에 위치한 양달 골짜기에 자리한다. ‘밝다’의 옛말을 음차 표기하는 과정에서 박(朴)이 백(栢)으로 변한 것으로 본다. 또 다른 설로는 마을 입구에 잣나무가 있어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이 잣나무가 마을을 융성하게 할 것이라 하여 잣 백(栢), 길할 길(吉)로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잣나무가 없어졌다.
[형성 및 변천]
백길리 우봉 김씨(牛峰金氏) 입향조는 무암(茂庵) 김상경(金尙涇)이다. 김상경의 7대조인 우봉 김씨 참찬공파의 파조인 좌참찬 김계장(金繼長)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양산에 적소되었는데, 복권 후에도 귀향하지 않고 자손들이 그 인근에 이거하여 살게 되었다. 김상경의 5대조인 익도(益都) 김대련(金大連)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천거를 받아 벼슬길에 나아갔고, 임진왜란 때 인생문을 지키다가 4곳의 문이 무너지자 북진하는 왜적을 쫓아 많은 적군을 무찌르고 전사하였다. 김대련은 양산 교동에서 계속 살았는데, 1750년경 그의 현손인 김상경이 기장 철마로 이거하였다.
김상경은 자가 극문(克文)으로 천성이 영특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학덕은 경지에 닿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부사와 농부들에게 경계를 하여 왜인들의 거짓 꾐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는 등 후학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정조(正祖) 조에 나라에서 교지가 내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형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김상경의 7세손 참봉 후봉 김운일은 독립운동가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안적사[앵림사]에 잠시 몸을 숨기고 지은 시가 「앵림사(鶯林寺)」다.
앵림사(鶯林寺)
승취부휴촌보정(乘醉扶携寸步程)[술이 올라 지팡이에 의지하여 몇 걸음을 걸어 보는데]
양삼화상출문영(兩三和尙出門迎)[밖에서는 두셋 수행 승려가 문에서 맞이하네.]
산화개자지지접(山花開紫枝枝蝶)[산의 꽃들이 피어 붉어진 가지마다 나비가 찾아들고]
간류교청곡곡앵(澗柳交靑谷谷鶯)[산골짜기 버들 사이로 앵무새가 푸름을 다투네.]
포습무진승몽담(蒲槢無塵僧夢淡)[갯버들 쐐기는 티끌 없는 세상 스님의 담박함이며]
석천명호객심청(石泉鳴戶客心淸)[돌샘의 울부짖음은 길손의 마음을 맑게 하구나.]
서봉월락신종도(西峯月落晨鍾到)[서쪽 봉우리 지는 달은 종소리로 새벽을 이르게 하며]
작설신다만진굉(雀舌新茶滿進觥)[작설로 된 새로운 차 큰 잔에 가득히 채워 본다네.]
(출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기장 사찰조)
[자연 환경]
백길리 북쪽에서 공덕산과 거문산[543m]이 배후 산지를 이루며,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남쪽으로 흘러 철마천에 유입한다. 산지의 동남부 말단 쪽에 평지가 발달하였는데, 이곳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백길리에는 우봉 김씨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기장군 철마면 곰내길 104-15에 김대련과 김상경을 모신 재실인 백산단(栢山壇)[덕수당(德修堂)]이 있다. 이곳에서 음력 3월 그믐 유림제를 봉행한다. 덕수당은 백산단의 유림제를 관장하는 당호이다. 1932년 건립하였다.